2020년 02월 독후감

2020. 3. 2. 21:07


01. 곰탕 / 김영탁 / 아르테


영화 <헬로우 고스트>로 유명한 김영탁 감독이 쓴 첫 소설이다. 헬로우 고스트는 개봉 당시 영화관에서 봤는데 웃으며 들어갔다가 생각지도 못한 반전 때문에 눈물을 줄줄 흘리며 나왔었다. 이 소설도 재밌다고 재밌다고 난리였는데 계속 무시하다가 (남들이 재밌다고 하는 거 무시하다가 뒤늦게 찾아보는 병이 있음) 작가가 헬로우 고스트 감독님인 걸 알고 바로 책을 샀다. 원래는 두 권인데 새로 나온 합본 리커버 에디션이 표지도 더 예쁘고 가격도 저렴해서 합본으로 샀다.

2063년 부산은 쓰나미로부터 안전한 잘 사는 윗동네와 파도에 휩쓸려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못 사는 아랫동네로 생활 터전이 나뉘어 있다. 부모의 얼굴도 모르고 고아원에서 자란 '우환'은 몇십 년째 아랫동네에서 식당 주방 보조로 일하고 있다. 어느 날 식당 주인이 곰탕 맛을 배워오라며 우환을 과거로 가는 시간 여행 잠수함에 태워 보낸다. 2019년 부산에 무사히 도착한 우환은 '맛있는 곰탕 만드는 법'을 배우기 위해 예상치 못한 인물을 만나고, 예상치 못한 선택을 하고, 그 예상치 못한 것들이 쌓이고 쌓여 예상치 못한 결말로 향해간다.

나이 마흔을 앞두고 아버지가 좋아하시던 곰탕을 먹다가 아버지가 살아계시던 때로 돌아가 함께 곰탕을 먹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시간 여행'을 떠올리게 됐다는 작가. 그렇게 시작된 소설이 곰탕이라고 한다. 이 소설 초고를 40일 만에 완성하셨다니 모든 창작물은 그야말로 하늘에서 내려주는 게 맞는 건가 싶다. 문장이 짧아 잘 읽히고 결코 유쾌한 내용이 아닌데도 적절한 유머 때문인지 그리 우울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 장점이었다. 글로 읽는 영화 같았던 소설 곰탕. 우환이 만들어주는 뜨끈한 곰탕 맛이 무엇보다 궁금했는데 그 맛은 영원한 알 수 없을테니, 다른 곰탕 맛집이라도 찾아봐야겠다. 곰탕이 땡긴다.

말이 적은 사람이 일을 잘하는 경우가 많다. 말이 적은 사람이 말귀를 잘 알아듣는 경우가 많다. 말을 적게 해보면 안다. 입을 좀 닫고 얼굴에 달린 다른 것들을 활용해보면 훨씬 더 많은 게 보이고, 많은 걸 알게 된다. 말로만 말하고 말로 오해를 만들고 말로 싸움을 걸로 말로 인생을 망치는, 문제는 언제나 말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사람들에게 타인의 일은 모두 이벤트였다.



02. 디디의 우산 / 황정은 / 창비 / E

<百의 그림자> 이후에 읽은 저자의 글들은 너무 우울해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우울이어서 한동안 그의 글을 멀리했었다. 입소문이 좋아 속는 셈 치고 읽게 된 이 소설 또한 우울했다. 그것도 너무나 밀도 높게 꽉 찬 우울이었다. 이렇게나 짧은 분량에 그렇게나 많은 걸 담았을 줄이야. 이래서 작가구나 싶다가도 이래서야 독자가 읽다가 숨 막히지 않을까 싶었다. 이 소설의 분량이 적은 것은 숨 막히기 직전에 독자를 구출하기 위한 작가의 배려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이상 잡소리였고, 우리가 겪었고 지켜보았던 근현대사와 세월호, 대통령 탄핵, 페미니즘에 이르기까지 뭐하나 쉽게 넘어갈 이야기가 없었다. 문학이 정치색이 짙다고 혹평을 하는 이도 있던데 정치란 것이 언제부터 문학의 소재로 쓰이면 거북할 만큼 대단한 것이었나. 정치란 것이 언제부터 문학의 순수를 해칠 만큼 대단한 것이었나. 그들이 거북한 이유는 서로 다른 색에 있는 것이 아닐까. 작가가 자신의 글로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한다는데 뭐가 그리 불만인지 이해할 수 없다. 싫으면 읽지 않으면 될 일이다. 여전히 우울하긴 했지만, 百의 그림자에도 나왔던 세운상가가 재등장해서인지 마냥 낯설지만은 않았고, 내가 보고 겪었던 일들을 타인의 시선으로 다시 되짚어 보는 시간 또한 의미 있게 남았다.

(전략) 한 사람이 말하는 상식이란 그의 생각하는 면보다 그가 생각하지 않는 면을 더 자주 보여주며, 그의 생각하지 않는 면은 그가 어떤 사람인가를 비교적 적나라하게 보여주는데 당신은 방금 너무 적나라했다고 말해주고 싶다고. 그렇지. 적나라赤裸裸. 그 광경은 마치 투명한 창을 통해 보이는 남의집 베란다처럼…… 우리는 왜 때때로 베란다를 청소하듯 그것을 점검해보지 않는 것일까. 모조리 끄집어내서 거기 뭐가 쌓였는지도 확인을 좀 해보고 먼지도 털어보고 곰팡이 끼거나 망가진 것은 닦거나 내다버리고 하면서 정리도 다시 해보고 새로운 질서로 쌓아보거나…… 하지를 않는 걸까 좀처럼.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일까?



03. 가재가 노래하는 곳 / 델리아 오언스 / 살림

다섯 살 '카야'가 홀로 늪에서 성장하는 이야기와 늪에서 죽은 청년의 죽음을 추적하는 두 가지 이야기가 번갈아 나오다 끝내는 하나의 이야기로 합쳐진다. 이 소설을 읽는 내내 카야와 점핑 아저씨, 메이블 아줌마를 제외하곤 다 짜증 나는 쓰레기란 생각만 들었다. 그중에서도 카야의 부모는 정말 최악이다. 뇌가 어떻게 생겨먹어야 다섯 살 먹은 어린 여자아이를 아무도 없는 늪, 다 쓰러져가는 오두막집에 홀로 남겨두고 떠날 수 있는 건지. 언니, 오빠들이 떠난 건 어느 정도 이해를 하지만 부모는 정말 용서할 수 없었다. 머리로는 지어낸 이야기라는 걸 알면서도 카야를 버린 가족과 남자들, 숨 쉬듯 차별하는 마을 사람들에게 읽는 내내 화가 났다. 그런 와중에도 카야는 자연을 벗 삼아 너무나 아름답고 총명하게 자라난다.

카야는 어릴 때부터 새의 깃털과 조개껍데기를 모아 표본을 만들고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썼는데 그 작업은 마침내 책으로 출간되어 많은 이들에게 인정받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사랑을 찾고 평화로운 여생을 보내던 카야는 자연 속에서 조용히 숨을 거둔다. 그는 생전에 총 일곱 권의 책을 출간한 명실상부 늪 생태계 전문가였고, 훌륭한 시인이었으며, 존경받아 마땅한 인물이었다. 마지막 부분에 반전처럼 밝혀진 사실 하나는 카야의 삶을 평가하는데 그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묘사가 많은 문장과 번역체 때문에 호불호가 갈릴 소설이고, 개인적으로 상 받은 목록이나 추천사를 책에 싣는 걸 싫어하는데 이 책이 구구절절 그러고 있어서 그 부분에서도 마이너스였다. 소장보단 빌려 읽는 것을 추천한다.

상상력은 깊디깊은 외로움에 뿌리를 내리고 자란다.

대자연에, 저기 가재들이 노래하는 곳에서는 이렇게 잔인무도해 보이는 행위 덕분에 실제로 어미가 평생 키울수 있는 새끼의 수를 늘리고, 힘들 때 새끼를 버리는 유전자가 다음 세대로 전해져. 그렇게 계속 끝없이 이어지는 거야. 인간도 그래. 지금 우리한테 가혹해 보이는 일 덕분에 늪에 살던 태초의 인간이 생존할 수 있었던거라고.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 여기 없을 거야. 아직도 우리는 그런 유전자와 본능을 갖고 있어서 특정한 상황이 닥치면 발현되지. 우리의 일부는 언제까지나 과거의 그 모습 그대로일 거야. 생존하기 위해 해야만 했던 일들, 까마득하게 오랜 옛날에도 말이야.



04. 고슴도치 / 한새희 / 우신 / E

3년을 넘게 만났고 곧 결혼해서 남편이 될 남자친구는 소위 있는 집 아들이다. 그 있는 집 아들의 어머니께선 시장에서 생선을 팔아 나이 차이 크게 나는 여동생과 딸을 키운 자랑스러운 내 어머니를 대놓고 무시한다. 엎친 데 덮쳐 남자친구는 어머니로부터 나를 지켜줄 든든한 방패막이 되어주지 못한다. 그래서 윤선우는 결혼 50여 일을 앞두고 파혼을 결정한다. 마지막으로 남자친구를 만나고 돌아오는 날 하늘에선 비가 내렸고 선우는 눈물을 흘렸다. 될놈될이라고 했던가. 선우가 이별에 슬퍼하며 비 맞으며 울던 그때, 그 모습을 보고 반해버린 또 다른 남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윤정후다. 윤정후의 윤선우를 향한 도끼질은 생선 가게에서 꽁치 열 마리를 사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한동안 이름 없이 '꽁치 열 마리'로 불리던 남자 윤정후는 어느덧 윤선우의 뾰족한 가시를 모두 사라지게 했고 둘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로 끝나는 소설이었다.

외모, 재력, 집안, 능력까지 완벽한데 성격까지 좋은 윤정후가 제일 비현실적인 인물이었고, 비겁하고 나약한 이민재가 가장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이민재가 가진 조건의 발끝도 못 따라가면서 대접받길 원하는 남자가 대부분이라는 게 진짜 현실이긴 하지만 우울하니 거기까진 나아가지 말자. 특별히 글을 잘 쓴다거나 내용이 새롭진 않았지만 내내 따뜻했고 착한 이야기였다. 이북엔 오탈자가 몇 군데 보여서 조금 거슬리기도 했다. 3년 전에 사놓은 로맨스 소설 이북은 아직도 몇 권이나 남아 있다. 언젠간 다 읽으려나. 판타지보다 더 판타지인 게 로맨스 소설 · 로맨스 영화라는 걸 깨닫고 더는 설레지 않게 된 순간, 진짜 어른이 된 건지도 모르겠다.

그 사람이랑 있으면 내가 무지 잘난 사람 같고, 무지 예쁜 사람 같고, 무지 행복한 사람 같아.



05. 묵향 35 / 전동조 / 스카이북

이쯤 되면 작가와 독자의 대결이다. 작가가 완결을 낼 것인가? 독자가 완결까지 버틸 것인가? 이미 대부분의 독자가 떠났지만 난 오기가 생겨서 완결까지 보려고 버티고 있다. 하지만 40권 안에 완결이 안 나면 나도 포기할까 한다. 작년 1월에 나온 35권을 이제야 읽었는데 (1년이 더 지났는데 아직도 36권이 안 나오다니) 역시나 이야기 전개는 지지부진하다. 그나마 라이가 각성을 좀 하긴 했는데 아직 갈 길이 멀어 보인다. 아르티어스는 어디다 팔아먹고 안 나오나 했더니 마지막에 소식만 전하는 정도로 잠깐 나오고 끝이었다. 다음 권에선 좀 더 나올 거 같긴 한데 전혀 기대되지 않는다. 이 소설을 읽을 때마다 '떠나야 할 때를 알고 떠나는 자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라는 말이 떠오른다. 이젠 아름답게 떠나긴 틀렸으니 유종의 미라도 거두시길 바란다. 독후감에 넣을 괜찮은 문장을 찾아보려 했지만, 도저히 없어서 패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