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 독후감

2020. 1. 9. 09:23

01. 설이 / 심윤경 / 한겨레출판

<나의 아름다운 정원>으로 유명한 심윤경 작가의 새로운 성장 소설. 이번엔 자신에게 주어진 거지 같은 설정값과 맞서 싸우는 소녀 '설이'가 주인공이다. 설이의 대표 설정값은 '고아', '똑똑함', '당참', '이모'다. 눈이 쏟아지는 새해 첫날 음식물 쓰레기통에서 발견된 설이의 모습은 고스란히 미디어에 노출이 되고 덕분에 보육원엔 후원이 쏟아진다. 이후 설이는 몇 번의 입양과 파양을 반복하다 보육원 이모와 함께 살게 된다.

설이가 6학년이 된 어느 날, 어떤 사건을 계기로 설이는 이모와 함께 살던 집과 원래 다니던 학교를 떠나 새로운 집과 학교에서 생활하게 된다. 생활 환경이 완전히 바뀌어 버린 이때부터 설이의 진짜 싸움이 시작된다. 재벌 자녀만 다닌다는 사립 초등학교에서 설이가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높은 성적'과 '만만하게 보이지 않는 성격' 두 가지였다. 공부만 잘하고 착한 것보단 공부도 잘하고 싸가지 없는 편이 자신에게 유리하다는 걸 설이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설이는 곽은태 선생님을 동경하고 그런 아버지 밑에서 자란 시현이를 부러워하지만 실제로 그들과 부딪히면서 그 생각은 서서히 바뀌게 된다.


경제적으로 풍족한 가정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부모와 자식 간이 된다면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일 테지만 어디 현실이 그렇게 호락호락하던가. 소설 속 서현이네처럼 객관적으로 뭐 하나 부족함 없는 가정에 태어난다 해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해 언제까지고 평행선만 그리는 관계일 수도 있고, 설이네처럼 겉으로 보기엔 한없이 부족해 보여도 실상은 넘치는 사랑으로 충만한 관계도 있는 것이다. 소설을 읽고 부모와 자식 사이를 매끄럽게 만드는 건 객관적인 조건도 중요하지만, 그에 앞서 사람 그 자체가 더 중요하단 생각이 들었다.

설이의 말처럼 이 세상에 흔들리지 않는 어깨는 없다. 부모도 사람이기에 흔들릴 수 있다. 하지만 너무 많이 흔들리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자식이 멀미가 나서 망가져 버리거나 도망가 버릴 수도 있으니까. 내 자식을 키워 본 적은 없지만, 조카를 봐도 그렇고 이런 허구의 이야기를 읽어도 그렇고 인간이 인간을 키운다는 건 참으로 어려운 일이란 생각이 든다.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옛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02. 레오파드 / 요 네스뵈 / 비채

요 네스뵈의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여덟 번째 작품이며 <스노우맨> 이후의 이야기다. 스노우맨 사건으로 많은 것을 잃은 해리는 저 멀리 홍콩까지 날아가 아무런 목적 없는 삶을 이어간다. 해리가 홍콩 뒷골목을 전전하고 있을 때 노르웨이에선 스노우맨을 모방한 연쇄살인범이 다시 나타나고 형사 '카야'는 해리의 도움을 얻고자 홍콩까지 그를 찾아간다. 어렵게 사건을 맡게 된 해리의 앞엔 다시 한번 고생길이 펼쳐진다. 이 소설을 단 하나의 이미지로 표현한다면 단연 '레오폴드의 사과'다. 연쇄살인범이 살인 무기로 사용한 것으로 동그란 사과 모양이며 재질은 금속, 잘못 건드리면 숨겨져 있던 수십 개의 바늘이 튀어나온다. 글로 읽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한 살인 도구였는데 이 악명 높은 레오폴드의 사과에서 벗어난 해리도 어지간히 독한 인간이다 싶다. 내가 해리였다면 차라리 편해지는 쪽을 선택했을 텐데 작가 때문에 죽는 것보다 고통스러운 삶에 묶여있어야 하는 그가 안쓰러웠다. 그래도 살아남았으니 해리는 행복한 걸까? 이 시리즈가 언제 끝날는지 모르겠지만 마지막엔 그래도 해리의 웃는 얼굴을 봤으면 좋겠다. 전체 800쪽으로 아주 두툼한 두께를 자랑하는 책이었는데 흡입력이 있어 금방 읽었고, 개인적으로 스노우맨보단 레오파드가 훨씬 재밌었다.



03. 진이, 지니 / 정유정 / 은행나무

이 소설은 인간 두 명과 한 마리의 유인원 '보노보'의 이야기다. 인간과 유전자가 98.7% 일치하는 보노보는 지능이 높으며 행동 또한 인간과 비슷하다. 유인원 책임사육사로 일하는 '진이'는 마지막 출근날 구조 작업에 나섰다가 운명처럼 보노보 '지니'와 재회하고 운명처럼 영혼이 바뀐다. 사고로 병원에 잠들어 있는 진이의 몸엔 지니가 숲으로 탈출한 보노보 지니의 몸엔 진이가 존재하는 것이다. 막연히 자신의 몸이 있는 병원으로 가면 문제가 해결될 거라 생각한 진이는 지니의 몸을 한 채 돌아다니다 백수 '민주'를 만난다. 취직하지 못해 집에서 쫓겨난 민주는 노숙을 하다 보노보 모습을 한 진이와 만나게 된 것이다. 어렵게 의사소통에 성공한 두 사람은 협력하여 병원까지 함께 가기로 하지만 그 길은 험난하기만 하다. 우여곡절 끝에 자신의 몸과 마주한 진이는 생사를 좌우하게 될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나는 진이가 인간인 자신에게도 보노보인 지니에게도 옳은 선택을 했다고 믿는다. 그가 보노보의 몸으로 생을 이어갔다 한들 언젠가는 본능에 먹혀 인간의 자아는 없어지고 온전히 보노보로만 남았을 것이다. 인간이 인간으로 살 수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정유정 작가 책 오랜만에 읽었는데 읽는 내내 마음이 찡했고, 인간과 보노보 사이의 1.3%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책이었다.



04. 공공연한 고양이 / 최은영 외 / 자음과모음 / E

열 명의 작가가 들려주는 열 편의 '고양이' 이야기. 고양이를 좋아해서 골랐는데 단편 소설집이라 가볍게 후루룩 읽을 수 있었다. 지하 주차장에서 발견한 고양이를 임시 보호했다가 입양시키는 이야기를 담은 <임보 일기>를 시작으로 아픈 고양이의 수혈을 담당하는 공혈묘 이야기를 다룬 <덤덤한 식사>, 이백 년 넘게 죽음을 거부하고 있는 고양이 이야기 <묘령이백>, 하루아침에 사라진 고양이를 추적하는 <유니버셜 캣샵의 비밀> 등 현실적이고 때론 환상적인 이야기를 만날 수 있었다. 본투비 고양이 덕후인 나는 몇 년 전부터 이어진 고양이 붐이 좋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걱정스럽기도 하다. 고양이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으로 바뀌고 있는 건 환영하지만 유행에 휩쓸리듯 고양이를 데려왔다가 감당하지 못해 버리는 사람도 많아서 걱정이다. 본문에선 이런 인간을 배신의 동물이라 표현했다. 내가 버리면 이 생명이 죽을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끝끝내 약한 생명을 죽음으로 내모는 배신의 동물 인간. 모든 반려동물을 사전 등록제로 바꾸고 키우다 버리면 높은 벌금이라도 매겨야 그나마 생명을 유기하는 일이 줄어들지 않을까 싶은데 우리나라에서 이런 제도가 시행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다.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죽음까지 책임질 수 없다면 애초에 키우지 않는 것이 옳은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