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09월 독후감
01. 고스트 라이터 / 로버트 해리스 / 랜덤하우스코리아
영국 전 수상 '애덤 랭'의 전 참모이자 자서전 대필 작가 '마이클 맥아라'가 페리에서 떨어져 익사한 채 발견된다. 사망한 맥아라에 이어 자서전 대필을 맡게 된 건 주인공 '나'이다. 거액의 대필금액을 제의받은 나는 망설임 끝에 제의를 수락한 후 원활한 대필 작업을 위해 출판사가 마련한 미국의 섬으로 애덤 랭과 함께 떠난다. 빠른 시간 안에 자서전을 완성 시키기로 약속한 터라 섬에 도착한 후 줄곧 자서전 작업에 매달려 있던 나는 우연히 죽은 맥아라의 방에 들어갔다가 그가 남긴 메시지를 발견하게 된다. 맥아라가 남기고 내가 발견한 메시지가 의심의 불씨가 되어 이야기의 판도를 바꾼다. 유령 작가에 의해 음모와 배후는 밝혀지지만, 마지막까지 진실을 마주하는 건 유령 작가와 글을 읽는 익명의 독자, 결국 유령들뿐이다. 바뀌는 건 없다. <콘클라베>에서도 느꼈지만, 로버트 해리스는 논픽션 소재를 픽션 세계로 가져와 새로운 이야기를 만드는 데 탁월한 재능이 있어 보인다. 콘클라베만큼은 아니었지만 이 소설도 읽을 만 했다.
02. 귀신나방 / 장용민 / 엘릭시르 / E
'오토 바우만'은 브로드웨이 뮤지컬 극장에서 17살 소년을 살해한 혐의로 체포된다. 소년과 범인과의 접점은 전혀 찾을 수 없고 범인도 입을 열지 않으니 살인의 동기는 오리무중인 상태. 사형이 확정되고 형 집행을 사흘 앞둔 날 오토 바우만은 기자 '크리스틴'과의 면회를 요청한다. 죽음을 앞둔 사형수는 크리스틴에게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한다. 크리스틴의 사형수 인터뷰가 시작되는 부분부터 소설에 빨려 들어가기 시작하는데 중간중간 이야기가 끊길 때마다 짜증 났을 정도로 흡입력이 대단했다. 이미 닳고 닳도록 쓰인 '히틀러'라는 소재 때문에 참신함은 부족했지만 읽는 재미는 충분했다. 역시 믿고 읽는 장용민 작가다. 소장용까진 아니고 킬링타임용으로 추천한다.
03. 폼페이 / 로버트 해리스 / 랜덤하우스코리아
로버트 해리스의 팩션 (픽션+팩트) 소설로 폼페이 화산 폭발이 일어나기 전 48시간과 이후의 48시간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과거 로마는 꾸준한 물 공급을 위해 근처 산에 수로를 설치하고 수도교를 건설한다. 수도교를 관리하는 수도기사인 아틸리우스가 화산 폭발 이틀 전 갑작스럽게 물이 끊기고 유황 냄새가 나는 등 이상 현상을 목격하고 조사를 시작한다. 아틸리우스가 물이 끊긴 원인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면서 만나는 로마의 여러 인물은 예나 지금이나 인간과 인간이 만든 사회는 크게 달라진 점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자연 앞에 인간은 한낱 미물에 불과하다는 사실 또한 깨닫게 된다. 긴장감이 넘치거나 화려하지 않아서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그 때문에 더 현실적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모자람과 넘침은 한 끗 차이가 아니던가. 로버트 해리스는 절제를 아는 작가다.
04. 마녀식당으로 오세요 / 구상희 / 다산북스 / E
마녀, 마법 이런 동화적이며 비현실적인 소재는 언제나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하는 일마다 꼬이는 우리의 주인공 '진'은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전 재산을 털어 엄마와 함께 식당을 차린다. 하지만 그 식당마저 말아먹고 엄마는 아빠 곁으로 떠나고 덜렁 혼자 남게 된다. 마녀는 그때 진에게 살며시 다가와 소원을 이뤄주는 음식을 만들어 준다며 접근한다. 마녀의 음식을 먹고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 진은 급기야 마녀와 동업을 하기에 이른다. 마녀와 함께 소원을 이뤄주는 음식 장사를 하게 된 것이다. 과연 진의 앞날엔 마법처럼 환상적인 일만 일어날 것인가. 마녀와 마법이란 소재만 비현실적이었지 다른 부분은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섬뜩하기까지 했다. 공짜는 없다는 우리네 오래된 명언처럼 마녀의 소원도 공짜가 아니었다. 마녀는 소원을 들어주는 대신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아 간다. 그 대가는 손가락 하나일 수도 있고 목소리일 수도 있고 때론 평생의 기억일 수도 있다. 마녀에게 빈 소원은 반드시 이루어지지만, 자신이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부작용도 존재한다. 그래도 당신은 마녀의 음식을 먹고 소원을 빌 것인가? 나는 아직도 고민된다.
05. 너무 한낮의 연애 / 김금희 / 문학동네 / E
요즘은 한국 여성 작가의 글 위주로 책을 읽고 있다고 전에 블로그에 썼던 기억이 있는데 내가 모르고 지낸 작가들이 생각보다 많아서 매번 새로운 여성 작가의 글을 읽을 수 있음이 즐겁다. 단편 소설집을 읽다 보면 무엇 하나 튀지 않고 글 전체가 하나의 인상으로 남는 일란성 쌍둥이 같은 글이 있고 저마다의 색과 개성을 지니고 있지만, 결국엔 어딘가가 닮아있는 이란성 쌍둥이 같은 글이 있다. 김금희 작가의 단편집은 후자였다. 저마다의 색을 가진 아홉 편의 단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조중균의 세계>였다. 출판사에서 근무하는 그는 식대 구만육천 원을 받기 위해 밥을 먹지 않고 자신이 밥을 먹지 않았음을 확인 받기 위해 정수기 앞에서 한 시간을 서 있는 남자다. 회사 내 왕따나 다름없지만 그는 그만의 삶의 방식을 고집하며 절대 타협하지 않는다. 조중균의 고지식하고 정직한 세계는 그가 매번 써 내려가는 시 '지나간 세계'와 닮아있다. 지나간 것이, 불편한 것이, 모두 쓸모없는 것은 아니며 이런 오래되고 불편한 것들을 잊지 않고 붙들고 있는 사람도 우리 사회엔 꼭 필요하단 생각이 든다. 아무 기대 없이 읽은 책인데 생각보다 글이 마음에 들어서 다음번엔 장편 소설을 읽어보려고 한다.
06. 방구석 미술관 / 조원재 / 블랙피쉬 / E
미술은 문외한이지만 문외한이 읽기 딱 좋은 책일 듯 하여 빌려 보았다. 익히 알려진 유명 화가들의 개인사부터 어떻게 미술에 입문하게 됐는지 어떤 작품을 남겼는지에 대해 간략히 소개한 책이다. 본문에서 여러 화가의 그림을 만날 수 있었는데 인물보단 풍경화를 좋아해서 그런지 클로드 모네의 그림이 제일 좋았다. 특히 수련 연작이 마음에 들었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세월을 뛰어넘는 모양이다. 전에 읽다가 멈춘 소설의 소재가 모네의 수련 연작이었는데 다시 읽어볼까 싶다. 이북으로 읽었는데 무슨 이유에선지 이북엔 파블로 피카소, 마르크 샤갈, 마르쉘 뒤샹 파트가 빠져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무료 대여가 아니라면 이북 소장은 비추한다. 한 번쯤 읽어 볼 만하지만 소장용까진 아니었다.
07. 센서티브 / 일자 샌드 / 다산지식하우스 / E
민감하며 예민하고 내성적인 인간인 내가 지나칠 수 없었던 제목이었다. 저자 일자 샌드는 덴마크의 저명한 심리학자로 '민감함은 결함이 아니라 신이 주신 최고의 감각'이며 '민감함'은 고쳐야 할 대상이 아닌 개발해야 할 대상이라고 말하고 있다. 나는 특히 환경 변화와 소리 그리고 빛에 민감하다. 익숙한 공간, 익숙한 사람들 곁이 아니면 몸과 마음이 불안해서 도무지 진정할 수가 없다. 잠을 못 자는 건 기본이고 생리현상조차 원활하지 못하다. 대신 평소엔 집중력이 높아 일처리가 빠르고 공감 능력이 뛰어나며 외로움을 잘 느끼지 않고 행복을 느끼는 기준점 또한 낮은 편이다. 저자의 말대로 민감하다고 해서 단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쉽게도 '민감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다는 능력'이란 것은 딱히 없는 것 같지만 이런 성격이 고쳐야 할 대상이 아니란 말만으로도 위로가 된다. 민감하고 예민한 사람이라면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은 책이다.
08. 아무도 원하지 않는 / 이르사 시구르다르도티르 / 황소자리 / E
폭설이 내린 1974년 3월 어느 날, 아이슬란드 북부 크로쿠르 소년보호소 원장의 자동차 뒷좌석에서 10대 소년 두 명이 죽은 채 발견된다. 차량 배기구가 눈으로 막혀있었던 것으로 보아 명백한 유독가스 질식사였다. 다른 의심의 여지가 없었던 두 소년의 죽음은 조용히 불운한 사고로 처리된다. 40년 후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정부 조사위원회에 근무하는 '오딘'은 열한 살짜리 딸 '룬'을 키우고 있다. 룬의 엄마가 6개월 전 사고로 사망한 후 오딘은 직장도 옮기고 딸을 혼자 키우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그런 오딘에게 40년 전 문을 닫은 크로쿠르 소년보호소에서 정부의 귀책 사유가 발생할 학대나 인권유린이 일어났는지를 조사하는 일이 맡겨진다. 이 일은 원래 그에게 맡겨질 일이 아니었으나 조사를 진행 중이던 동료 로베르타가 심장마비로 사망하자 그에게 떠맡기듯 넘겨졌다. 이야기는 40년 전 사건 현장에 있었던 알디스와 40년 후 사건을 조사하게 된 오딘, 두 사람의 시점에서 전개된다. 깔끔한 문장에 마무리까지 완벽했고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스릴러 소설이었다. 마지막까지 뒤통수를 서늘하게 만드는 이야기를 읽고 싶다면 추천한다.
09. 부루마불에 평양이 있다면 / 윤고은 / 문학동네 / E
이북 대여 사이트를 뒤지다가 특이한 제목이 눈에 들어와서 읽어 본 책이다. 고르고 보니 또 단편집이지만 새로운 여성 작가라서 도전! 표제로 쓰인 단편이 제일 궁금했는데 선뜻 결혼을 결정하지도 헤어지지도 못하는 사귄 지 9년 된 연인이 평양 신도시 아파트를 계약한다는 내용이었다. 뜬금없이 평양 아파트 분양이라니 이건 정말 부루마불에서나 나올 법한 상황이다. 연인의 이별은 평양 아파트라는 담보로 인해 당장은 보류됐지만 어떤 결말을 맞을지는 알 수 없다. 여섯 편의 단편 모두 독특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오믈렛이 달리는 밤>이었다. 이벤트 회사에 다니는 서른아홉 미혼 '연경'에게 느닷없이 다가온 로맨스는 바닥에 떨어트린 오믈렛과 함께 느닷없이 달아난다. 오믈렛을 떨어트리지 않았다면 연경의 로맨스는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을까? 도대체 떨어진 오믈렛은 어디로 그렇게 빨리 달려간 걸까? 이 궁금증을 해소하려면 달아난 오믈렛을 데리고 이어지는 글을 써주시는 수밖에 없겠다. 작가님 부탁드립니다. 기발한 상상력과 엉뚱함이 어딘가 정세랑 작가와 닮아있단 생각이 들었고 역시나 장편이 궁금해지는 작가였다. 이렇게 '장편 필독 작가' 목록에 또 한 명의 작가가 추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