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08월 독후감

2019. 9. 18. 20:44



01. 탐정이 아닌 두 남자의 밤 / 시공사 / 최혁곤 / E

한국 추리 스릴러라는 소리에 혹해서 도진기 작가 정도는 되려나 싶어 읽기 시작했는데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한국 남성 작가 중에 젠더 감수성이 높은 작가는 매우 드문 편인데 이 정도면 그중에서도 최하위에 속할 것 같다. 페미니즘이나 젠더 감수성을 깨닫지 못했던 예전에 읽었다면 크게 거부감이 없었을지 모르지만, 이미 알아버린 지금은 이런 글을 읽는 것 자체가 고역에 가깝다. 돈이 아까워서 꾸역꾸역 끝을 보긴 했는데 기억에 남는 것도 없고 읽지 않은 것만 못한 책이었다.


02. 우리집 테라스에 펭귄이 산다 / 톰 미첼 / 21세기북스

아르헨티나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한 톰은 우루과이 해변에서 휴가를 즐기던 중 바다에 유출된 기름 때문에 죽은 펭귄 무리를 목격한다. 톰은 죽음이 드리워진 해변에서 용케도 살아남은 펭귄 한 마리를 발견하고 구조하게 된다. 그저 살려야겠다는 생각이 앞서 펭귄을 숙소로 데려가 기름을 없애고 다시 바다에 풀어주었지만, 펭귄은 그때마다 바다가 아닌 톰에게 되돌아온다. 어쩔 수 없이 펭귄을 아르헨티나까지 데려가기로 마음먹은 톰! 험난한 여정을 겪고 무사히 학교 숙소에 도착한 펭귄은 톰이 묵고 있는 방 테라스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다. 톰은 펭귄에게 '후안 살바도'라는 이름을 붙여주었고 후안은 금세 학교 전체의 스타가 된다. 후안에게 먹이를 주고 보금자리를 청소해 주기 위해 자발적으로 테라스를 찾는 아이들이 어찌나 귀엽던지. 살면 살수록 인간에게 대가 없는 사랑을 주는 건 동물 친구들이 유일하단 생각이 든다. 후안의 마지막이 너무 갑작스러워서 슬펐지만 후안의 이야기가 이렇게 글로 남아 앞으로도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안겨 줄 거라 생각하면 조금이나마 위안이 된다. 휴가 때 카페에 앉아서 한 번에 읽어 내려간 책이었는데 읽는 내내 행복하고 기분 좋은 이야기였다.


03. 샤이닝 상, 하 / 스티븐 킹 / 황금가지

샤이닝하면 영화 포스터 속 부서진 문 사이로 튀어나온 잭 니콜슨의 광기 어린 얼굴과 도끼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포스터가 워낙 강렬하게 뇌리에 박혀 있어 영화를 본 듯한 착각이 들지만, 영화 소개 프로그램에서 대충 봤을 뿐 제대로 영화를 본 적은 없다. 도대체 저 남자는 왜 저렇게 미쳐있는 건지 궁금하여 묵혀둔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너무 오래 묵혔는지 잉크가 날아가서 지워진 글자가 몇 군데 있었다. 파본은 몇 번 봤었는데 글자가 지워진 건 처음이다.

이야기의 주인공 잭네 가족을 살펴보자면 우선 아버지 잭 토런스는 과거 영어 교사였으나 학생을 폭행한 사건으로 교사직에서 해임된 후 변변한 직장을 갖지 못하고 있다. 그는 아들 대니가 어렸을 때 시끄럽다는 이유로 대니의 팔을 부러뜨린 적도 있고 알코올 중독에 빠지기도 했다. 잭의 아내 웬디는 젊고 아름답지만, 남편에게 제대로 맞서지 못하는 매우 수동적이며 우유부단한 여성이다. 아들 대니는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미래를 엿볼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 같은 능력을 가진 할로런 말고는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능력에 대해 말한 적 없다. 엄마 웬디만 어렴풋이 대니의 능력을 짐작하고 있을 뿐이다.

겨울 동안 문을 닫는 오버룩 호텔의 관리를 맡게 된 잭이 웬디와 대니까지 데리고 오버룩 호텔에 묵게 되면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도망갈 곳 없는 외지고 낡은 호텔 안에서 서서히 미쳐가는 잭과 그를 피해 살아남아야 하는 웬디와 대니. 잭이 미쳐가는 과정을 읽으면서 내내 웬디와 대니의 걱정만 했다. 지금이라도 내려가야 할 텐데 눈이 더 많이 내려 발이 묶이기 전에 내려와야 할 텐데 그들은 내려오지 않겠지. 그럼 믿을 건 할로런 뿐이구나 하면서 읽어 내려갔다. 책을 덮고 나서야 잭이야말로 가장 불쌍한 영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는 소설보다 차가운 느낌이라는데 기회 되면 찾아봐야겠다.


04. 국경시장 / 김성중 / 문학동네

여성 작가들의 책을 주로 읽고 있는 요즘, 우리나라에 이렇게 많은 여성 작가가 있었구나 새삼 깨닫고 있다. 이름 때문에 자칫 오해할뻔한 김성중 작가의 글을 읽는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전에 읽었던 <현남 오빠에게> 단편집에도 작가의 단편이 실렸었는데 까맣게 잊고 작가 이력을 보다가 알게 됐다. 각설하고, 여덟 편의 단편 중에서 표제로 쓰인 '국경시장'이 가장 좋았다. 나와 로나, 주코는 우연히 국경시장에 들르게 되는데 그곳에선 돈이 아닌 노란 물고기 비늘을 화폐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 비늘을 얻기 위해선 자신의 기억 하나를 팔아야 한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 하나를 팔고 비늘을 얻게 되지만 욕심을 부리다 기억을 다 팔아버린 주코는 급기야 물고기를 잡기 위해 강으로 뛰어든다. 노란 비늘 물고기는 15살 미만의 아이들만 잡을 수 있는데도 말이다. 기억을 다 팔아버린 로나 또한 영혼을 잃고 평생 국경시장에 매인 몸이 된다. 나는 국경시장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하지만, 기억을 잃기 전의 나로는 돌아갈 수 없는 상태가 된다. 나쁜 기억이든 좋은 기억이든 그 기억들이 없다면 더는 내가 아닐진대 인간이란 언제나 어리석다. 내가 만약 국경시장에 간다면 온전한 나로 돌아올 수 있을지 자문해 봤는데 솔직히 자신 없다. 나 또한 어리석고 나약한 인간이니까. 현실과 비현실을 잘 섞은 몽환적인 글이었는데 호도 아니고 불호도 아니었다. 장편소설을 읽어보면 답이 나올듯한데 이북으로 나온 게 있나 찾아봐야겠다.


05. 콘클라베 / 로버트 해리스 / 알에이치코리아

콘클라베란 교황이 선종하거나 사임하게 되면 전 세계 추기경들이 한자리에 모여 투표하는 가톨릭 교황 선출 선거 시스템이다. 3분의 2 이상의 득표를 얻어야 교황으로 선출되며, 3일 동안 투표로 결정되지 않으면 이후엔 다수결로 교황을 선출하게 된다. 혹시 소설을 위해 만들어낸 허구의 제도인가 싶어 검색해봤더니 실제로 가톨릭교회에서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제도였다. 2022년 10월 19일, 갑작스럽게 교황이 선종하고 전 세계에 흩어져 있던 118명의 추기경이 콘클라베를 위해 시스티나 예배당으로 모인다. 주요 인물을 살펴보자면 콘클라베가 무사히 치러질 수 있도록 관리를 맡은 로멜리 추기경, 프랑스계 캐나다인 조지프 트랑블레 추기경, 나이지리아인 조슈아 아데예미 추기경, 이탈리아인 조프레도 테데스코 추기경, 이탈리아인 알도 벨리니 추기경, 마지막으로 베일에 싸인 인물 베니테스 추기경까지. 이름이 조금 헛갈리지만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외우게 된다. 초반엔 조금 지루하다 싶었는데 투표가 시작되자마자 아주 흥미진진해진다. 누가 차기 교황으로 선출될지 궁금해서 읽는 걸 도저히 멈출 수가 없을 정도였다. 작가님이 은근 힌트를 많이 주었던지라 결과는 예측한 그대로였는데 그래도 직접 눈으로 확인하니 통쾌한 기분이 들었다. 이 책이 마음에 들어서 작가의 다른 책도 5권이나 사들였는데 두 권 읽은 지금까진 콘클라베가 1등이다. 지적 스릴러를 좋아하는 독자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