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07월 독후감

2019. 8. 10. 20:49


01. 잊기 좋은 이름 / 김애란 / 열림원

우연히 듀스의 '여름 안에서'가 등장하는 작가의 글을 읽고 이건 여름에 읽어야 하는 책이란 생각에 바로 책을 주문했다. 다음 날 도착한 택배를 개봉하니 처음 보는 육아 책이 까꿍! 배송 오류였다. 조금 돌아서 내 손에 들어 온 작가의 첫 산문집. 1부는 나를 부른 이름, 2부는 너와 부른 이름이란 부제를 달고 있다. 개인적으론 작가 본인 이야기를 써 내려간 1부가 훨씬 좋았다. 올해는 물론이고 최근 몇 년간 읽은 산문 중에 제일 마음에 드는 글이었다. 산문집을 왜 이제야 내셨는지 원망스러울 정도라면 나의 벅찬 마음이 설명되려나. 1부에 실린 글은 다 좋았지만, 듀스의 노래가 나오는 '언제나 꿈꿔온 순간이 지금 여기'와 '부사副詞와 인사'가 특히 마음에 들었다. 전자는 작가의 열다섯 여름을 2019년 여름에 고스란히 느낄 수 있어 좋았고, 후자는 전문 글쟁이로서 부사(副詞) 사용에 대한 딜레마를 토로한 글인데 밑도 끝도 없이 귀여웠다. 글 쓰는 방법에 대한 조언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불필요한 부사의 퇴출인데 도대체 어떤 부사가 필요하고 불필요한지 잘 모르겠다. 부사가 있든 없든 읽는 사람이 이해할 수 있고 막힘 없이 읽힌다면 무슨 문제가 있을까 싶다. 글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맛깔난 문장이 가득해서 읽는 내내 즐거웠다. 자주는 어려울 테니 잊을만하면 한 번씩 산문집을 내주셨으면 좋겠다.


02. 신을 받으라 / 박해로 / 네오픽션

<살(煞): 피할 수 없는 상갓집의 저주>를 쓴 박해로 작가의 신작이다. 지극히 한국적인 무속 공포소설을 쓰시는 작가님인데 첫 소설을 재밌게 읽어서 후속작도 기대하며 읽기 시작했다. 1876년 경상도 섭주, 천주교 교주 누명을 쓴 장일손은 자신을 처형하라 지시한 김광신과 망나니에게 무시무시한 저주를 남기고 참수당한다. 김광신의 지시로 장일손의 목을 벤 망나니 석발은 그가 죽은 이후 끝없는 악몽에 시달리다 선녀보살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지만 두 사람 모두 참혹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어린 딸을 눈앞에 두고 죽어야 했던 선녀보살은 두 개의 해가 뜨는 날에 그들이 돌아올 것이라는 예언을 남기고 숨을 거둔다. 그로부터 백 년 후 1976년 섭주에는 개척 교회가 자리 잡는다. 서울에서 섭주로 파견된 젊은 목사 김정균은 마을 사람들에게 주님의 말씀을 전파하고자 노력하지만, 무당의 딸인 묘화에게 만큼은 이상하리만치 차갑게 굴며 대면하는 것조차 피하려 애쓴다. 백 년의 시간을 기다린 장일손의 저주는 목사와 묘화 그리고 마을 사람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나타날 것인가! 신묘한 술법으로 백 년을 이어온 장일손의 저주와 무속 신앙, 현대 기독교를 잘 버무린 소설로 설정에 다소 억지스러운 부분이 있어 살짝 실망스럽기도 했지만 한 번쯤은 읽을만 했다. 내 성향이 현실적 공포가 아니면 무서움을 느끼지 않는 편이라 이 소설도 무섭진 않았다. 공포감이나 작품성, 재미 모두 '살(煞) : 피할 수 없는 상갓집의 저주' 의 압승이다.


03.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 김영하 / 문학동네

2010년에 출간된 단편 소설집이다. 본문에 실린 열 세 편의 단편 무엇 하나 평범하지 않다. 책을 다 읽은 후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는 글은 기름 맛이 나는 '아이스크림' 이야기다. 네모난 모양에 곱게 포장지에 싸여 상자 안에 얌전히 들어찬 미츠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는 부부가 있다. 그날도 부부는 똑같은 아이스크림 샀고 집에 도착해 아이스크림을 입에 넣었는데 평소와는 다른 묘한 맛이다. 기름 맛이 느껴지는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아서 몇 개 더 먹어 본 후 제조 회사에 전화를 건다. 회사 측 소비자 상담실에서 나온 중년 남자 직원은 부부의 집에 들러 문제의 아이스크림 네 개를 연달아 먹은 후 죄송하다는 사과와 함께 아이스크림보다 더 비싼 제품으로 보상하고 유유히 사라진다. 평범하지 않은 이야기들 속에 그나마 평범해 보이는 이야기라 기억에 남은 건지 뭔지 잘 모르겠지만 나이 지긋한 남성이 고객의 집에 앉아 묵묵히 아이스크림 네 개를 먹는 장면이 잊히지 않고 있다. 좌천을 당해 저런 업무를 맡은 건지, 저런 식으로 몇 집을 들러 아이스크림을 먹은 건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전체적으로 우울했고 여성을 바라보는 시각은 불편했고 독특함이 지나쳐 오히려 독으로 느껴지는 단편 소설집이었다. 전에 읽었던 단편집도 별로였던 걸 보면 작가의 소설은 단편보단 장편이 취향인 모양이다. 장편 중에선 <빛의 제국>이나 <검은 꽃>을 좋아하는데 최근엔 저런 분위기의 글을 써주지 않으셔서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