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0월 독후감

2017. 11. 28. 20:47


01. 그 숲에는 남자로 가득했네.e - 어마 리 에머슨, 진 뮤어

변변치 않은 인생에서 벗어나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 한 여성의 사랑과 성장을 다루고 있는 소설이다. 주인공 ‘리’는 소설가 지망생으로 언니 집에 얹혀살고 있다. 직장에선 짤리고 그나마 있던 남자친구에겐 배신당했다. 하지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는 법. 형부가 추천해준 직장의 면접을 보고 돌아가는 길에 들렀던 동물원에서 우연히 자신의 고향 마을에 있는 벌목 캠프에서 부주방장을 구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더는 잃을 게 없었던 리는 그길로 짐을 싸서 고향 '쿠스 베이'로 향한다. 벌목 캠프의 책임자인 올드 캠프에게 환대를 받은 리는 100여 명의 남자들이 우글거리는 깊은 산속 벌목장에서 부주방장으로 일하게 된다. 리가 해야 할 일은 백여 명의 건장한 남자들의 삼시 세끼를 준비하는 일이다. 아무것도 없는 산속에서 나무를 베고 옮겨야 하는 험난한 일을 하는 남자들의 유일한 낙은 먹는 것과 휴식시간에 하는 카드놀이 정도다. 그런 만큼 식사가 중요한데 엄청난 양의 요리를 빠른 시간 안에 해야 하다 보니 처음엔 우여곡절이 많았다. 모든 남자가 리에게 호의적인 건 아니었지만 리는 훌륭하게 적응해 나간다. 각양각색의 남자들 사이에서 기뻐하고 슬퍼하고 화도 내고 사랑하는 생활 속에서 리는 점점 더 단단하고 성숙한 사람으로 거듭난다. 제목에 이끌려 읽게 된 책이지만 독특한 환경에서 생활하는 다양한 인간군상을 엿볼 수 있어 재미있었다.


02. 아더월드 1,2 .e - 황유하
판타지 로맨스 소설로 지구에 사는 평범한 소녀 '지유'가 전혀 다른 세계에 떨어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성장이 멈춰버린 금발의 미소년 '카일'과 한쪽 눈을 잃은 은발의 왕자 '보로미르', 그리고 이(異) 세계에서 온 칠흑의 아가씨 '지유'. 우연인듯하지만 모두 운명이었던 세 사람의 만남과 헤어짐을 끝까지 지켜 본 후 남은 건 보로미르에 대한 연민뿐이었다. 이 외눈박이 왕자님은 등장 때부터 계속 눈에 밟히더니 끝까지 내 마음을 지르밟고 가버렸다. 실제론 뛰어난 능력을 갖췄으나 권력 싸움에 엮이기 싫어 부러 방탕한 생활을 했던 왕자가 한 여인으로 인해 진정한 사랑에 눈뜨는 대목까지는 흔한 이야기라 별 감흥이 없었다. 그런데 작가님의 마지막 한 방 때문에 내게 이 소설은 보로미르의 보로미르에 의한 보로미르를 위한 소설이 되어버렸다. 보로미르의 모습을 드라마 '베르사이유'의 필립 왕자에 대입해서 읽었더니 더 짠했다. 내내 카일과 지유의 이야기가 중심이었지 한 번도 그는 주목받지 못했는데 처음부터 그런 운명이었다니 너무나 가혹하다. 그들에게 다음 생애가 있다면 그땐 카일이 아닌 그가 더 행복하길 바래본다.


03. 비하인드 도어.e - B. A. 패리스
수많은 집의 문 안쪽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집 밖에선 보이지 않는다. 지극히 사적이기에 더욱 위험할 수 있는 문 너머의 공간. 이 소설은 따뜻한 보금자리가 되어야 할 집이 지옥으로 변하는 순간을 보여준다. 남편 '잭'은 승률 100%를 자랑하는 가정 폭력 전문 변호사다. 아내 '그레이스'는 다운증후군을 가진 여동생까지 보듬어 사랑해주는 그에게 반해 결혼한다. 그들은 겉으로 보기엔 능력 있고 자상한 남편, 가정적이며 사랑스러운 아내, 좋은 집까지 가진 아주 행복해 보이는 신혼부부다. 하지만 남편의 완벽함 뒤에 숨겨진 괴물은 시시각각 그레이스의 숨통을 조이는 것도 모자라 동생 밀리에게까지 손을 뻗으려 한다. 타인의 공포를 자양분 삼아 점점 더 자라나는 괴물에게 사랑하는 동생까지 넘겨줄 순 없는 일이다. 초반부 절망적이고 수동적으로만 보였던 그레이스가 동생을 지키기 위해 반격을 시작했을 땐 제발 성공하여 자유를 찾길 간절히 바라며 읽었다. 그레이스에게 힘이 되어준 밀리와 에스터에게 한없이 고마워지는 이야기였다.


04. 아웃 1,2 - 기리노 나쓰오
전부터 읽어보려던 책인데 새 책을 사자니 아깝고 이북은 없고 결국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구매해 읽었다. 마사코, 요시에, 쿠니코, 야요이는 도시락 공장 야간 조에 근무하는 동료다. 야요이의 우발적인 살인에 네 명의 여성이 얽히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제목에서부터 짐작되듯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대부분은 밝고 건강한 사회에서 아웃된 사람들이다. 겉으론 평범한 가정주부로 보이는 여성들이 욕실에서 시체를 토막 내 유기한다. 분명 처음엔 사고였고 동료를 돕는다는 이유가 있었지만, 이후의 작업은 돈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다. 그 끔찍한 작업도 처음이 어려웠지 점점 더 무감각해진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해가는 여성들의 심리상태를 섬세하게 묘사했다는 점에선 후한 점수를 주고 싶다. 특히, 시체 처리를 주도하는 마사코가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읽는 내내 이렇게까지 잔인하고 자극적일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저마다 취향이 다르겠지만 나에겐 굳이 찾아 읽을 필요는 없는 책이었다.


05. 몬스터 콜스 - 패트릭 네스
어른을 위한 동화책. 영화로 먼저 알게 된 작품인데 영상으로 보기 전에 책으로 읽는 걸 좋아해서 원작 소설을 샀다. 이북이 없어서 종이책으로 샀는데 양장에 두꺼운 종이라서 몇 장 되지 않는 책인데도 엄청 무거웠다. 소개 글을 읽어보니 처음 이 글을 구상한 작가분은 돌아가셨고 다른 작가분이 남겨진 구상을 토대로 글을 완성하셨다고 한다. 13살 소년 코너가 아픈 엄마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당당히 맞서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리고 있는 책이다. 코너는 밤마다 끔찍한 악몽에 시달린다. 악몽에 시달리기 시작한 어느 날 밤 12시 7분, 주목 몬스터가 코너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몬스터는 코너에게 앞으로 세 가지 이야기를 들려줄 테니 마지막 네 번째 이야기는 코너 자신이 이야기해야 한다고 말한다. 주목 몬스터는 비록 겉모습은 무섭지만, 코너가 스스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나무 요정에 더 가까웠다. 삶은 행동으로 쓰는 것이며 네가 무엇을 생각하느냐보다 네가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하다는 몬스터의 말이 깊게 울린다.


06. 이만큼 가까이.e - 정세랑
<보건교사 안은영>을 읽고 좋아서 정세랑 작가의 글을 다 찾아 읽고 있다. 작가에게 꽂혀서 닥치는 대로 읽어대는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지금까지 작가의 소설 다섯 편을 읽었는데 그중에서 이 소설이 가장 어둡다. 정세랑 작가의 글 중에서 어둡다는 거지 보편적인 한국 문학에서의 숨 막히는 어둠은 아니다. 소설엔 주인공이자 화자인 ‘나’와 여섯 명의 친구들 그리고 나의 첫사랑 ‘주완’이 등장한다. 파주에서 신도시 일산으로 통학하던 학창시절 이야기와 성인이 되어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된 현재의 이야기가 번갈아 서술된다. 나를 비롯한 모두는 살아가는 과정에서 누군가를 잃기도 하고, 누군가의 폭력에 노출되어 상처받기도 하고, 누군가의 실수로 인해 인생이 달라지기도 한다. 살면서 겪는 모든 상실은 아프다. 하지만 그 또한 영원하지 않기에 참을만 하다. 상처를 극복하는 건 온전히 내 몫이지만 소설 속 나처럼 좋은 사람들이 주변에 있다면 상처는 좀 더 빨리 아문다. 그 시절, 그들의 상처까지 아름다웠던 소설이었다.


07. 재인, 재욱, 재훈.e - 정세랑
재인, 재욱, 재훈 삼 남매가 아주 작지만, 신비한 능력을 얻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소재로 한 글이다. 정세랑 작가 소설 중엔 <보건교사 안은영>이 제일 좋았었는데 이 소설 읽고 나선 1순위가 바뀌었다. 현실적이지만 비현실적이고, 배꼽 빠지도록 웃기지만 눈물 날만큼 감동적이다. 삼 남매의 어머니께선 방학 때 늦둥이 막내아들 뒤치다꺼리가 귀찮다고 멋대로 교환 학생을 신청해버린다. 하필이면 미국 깡 시골 조지아로 교환 학생을 가게 된 재훈이의 이야기는 나를 아주 즐겁게 해줬다. 이웃집에 놀러 갔는데 화장실이 고장 나서 비 오는 날 휴지와 우산을 들고 삽으로 땅 파는 모습을 상상하니 어찌나 재밌던지. 퍽킹 퍽킹 조지아! 정세랑 작가의 글에선 건강함이 느껴져서 좋다. 같은 세대라 그런지 공감되는 문장도 많고, 글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아주 밝고 건강해서 읽고 나면 기분 좋아진다. 해피 바이러스 같은 작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