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야방 - 하이옌

2016. 9. 19. 17:03



드라마 랑야방의 완성도가 높은 데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원작 작가가 직접 각본을 썼다는 점도 크게 영향을 미쳤을 거라 생각한다. 소설과 각본의 차이를 알고 유연하게 각색까지 할 수 있는 작가라니 천군만마를 얻은 것이나 다름없다.

원작자가 드라마 각본을 써서 그런지 드라마와 소설의 차이가 거의 없다. 그래서 소설 읽는 재미는 덜 했지만 드라마를 떼어놓고 소설 자체로만 봐도 재밌고 잘 쓴 글이란 생각이 든다. 소재도 흥미롭고 등장인물이 꽤 많은데 저마다 다른 성격에 뚜렷한 개성이 느껴져서 좋았다. 드라마로 볼 때 너무 여운이 없는 거 아닌가 싶었는데 그나마 드라마가 나은 거였다. 소설에선 여운은커녕 감정 낭비 따윈 한 톨도 없이 단호하고 과감하게 이야기가 진행된다. 감정 과잉이 넘쳐나는 한국 문화에 익숙해서 그런지 그럴 기회조차 주지 않는 대륙의 단호함이 새로웠다.

예황과 임수의 관계는 드라마 쪽이 더 좋았고 매장소가 개암 과자로 정왕을 시험하는 장면이 드라마에 빠져서 아쉬웠다. 드라마 볼 땐 비류에게 매력을 못 느꼈는데 소설에선 비류가 참 귀여웠다. 짧게나마 비류의 과거도 나오는지라 짠한 마음이 들기도 했고. 원래 이야기 속 주인공들은 눈치는 없는데 정의감만 불타서 일만 저지르는 공통점을 갖고 있는데 정왕은 그 정도가 심해서 드라마에서나 소설에서나 고구마 100개 먹고 물 못 마신 거 마냥 답답했다. 정비랑 매장소가 옆에 있어서 황제가 된 거지 저 성격으론 혼자서는 황제 자리는 꿈도 못 꿀 일이다. 랑야방에서 가장 똑똑하고 무서운 사람은 정비와 고담이고 그 아래가 매장소. 이 세 사람만 있으면 거짓말 좀 보태서 세계 정복도 가능할 것 같다. 세 사람만으론 숨 막히니까 작가도 어디서 튀어나온 건지 모르겠다는 린신과 귀여운 비류도 함께 있으면 더욱 즐거운 세계 정복이 되겠구나.

독후감이라기보단 드라마와 소설 비교 글이 돼버렸다. 여기저기 말들이 많아서 읽기 전엔 오타나 번역이 걱정스러웠는데 1권엔 확실히 오타가 많지만 2, 3권에선 거의 보이지 않았다. 중국어를 모르니 번역 자체에 대해선 모르겠지만, 문장은 막힘없이 잘 읽힌다. 번역이란 게 외국어 이전에 모국어를 잘해야 하는데 그 점에선 만족스러웠다.


"······ 전 그저 소 형이 왜 이 금릉성의 소용돌이 속으로 뛰어들려고 하는지 알고 싶어요. 소형은 제가 가장 동경하던 강호인이에요. 그 어떤것에도 구속받지 않는 자유로운······." 매장소는 쓸쓸하게 웃으며 탁자 위의 콩알 같은 등불을 바라보았다. "틀렸네. 세상에는 본래 자유로운 사람이란 없어. 감정이 있고 욕망이 있는 한 영원히 자유로울 수 없다네." - P.448

정왕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선생은 일을 할 때 항상 이렇게 무자비하시오?" "저는 본래 이런 사람입니다." 매장소의 얼굴에는 아무 표정도 없었다. "배신하는 것은 언제나 친구지요. 적은 나를 팔아먹거나 배신할 기회조차 없으니까요. 가족처럼 가깝고 형제처럼 친한 사람도, 그 얇디얇은 피부 밑에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 P.49

몽지의 눈에서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은 듯 매장소의 얼굴에 안심한 듯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가볍게 말했다. "이제 아셨겠지요? 경염과 제가 함께할 수 없는 일이 많습니다. 지옥으로 떨어져 독을 품은 마귀가 되는 것은 저 혼자면 됩니다. 경염의 순수한 마음은 꼭 지켜야 해요. 경염이 반드시 알아야 하는 일도 있고, 또 천진한 생각을 바꿔놓을 필요도 있지만, 그의 기준과 원칙은 가능한 한 남겨둘 겁니다. 황위를 놓고 싸우는 동안, 그 마음이 너무 검게 물들면 안 됩니다. 훗날 그를 황위에 앉혔을때 태자나 예왕 같은 황제가 된다면, 기왕과 적염군은 그야말로 헛되이 죽은 것이 됩니다." - P.214
   
“천하는 모든 사람의 천하입니다.” 매장소가 엄하게 말했다. “백성이 없으면 천자가 무슨 소용이며, 사직이 없으면 황제가 무슨 소용입니까? 병사들이 전장에서 피로 목욕을 하며 싸울 때 폐하께서는 멀리 황궁에 앉아 조서만 내리시면서, 조금이라도 어기는 기미가 보이면 꺼리고 의심하며 무정하게 칼을 휘두르셨습니다! 폐하께서는 높디높은 권력만 마음에 두실 뿐, 단 한 번이라도 천하를 마음에 두신 적이 있으십니까? 기왕은 오로지 나라를 위해 국정을 보살폈고, 그렇게 쌓아올린 실적으로 부지런하고 현명하다는 평을 얻었습니다. 폐하와 의견이 달라도 대놓고 이야기했지, 남몰래 수작을 부린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올곧고 충직한 마음을 대드는 것으로 생각하셨군요. 독주를 마시는 기왕이 얼마나 낙담하고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폐하께서는 결코 알지 못하실 겁니다. 허나 지난날 부자의 정과 죽어도 폐하를 거스르지 않으려던 기왕의 마음을 생각해서라도 부디 진심으로 그의 결백을 밝혀 13년간 고통에 빠져 있던 영혼을 위로해주십시오. 그것이 그렇게 어렵고 힘든 일입니까?” 처음에는 화가 나서 하얗게 질렸던 황제도 마지막 한마디에는 심장이 난도질당하는 것처럼 아팠다. 그는 온몸에 힘이 쭉 빠진 듯 베개에 비스듬히 등을 기대고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 P.5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