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글 쓰는 일을 접어두고 독일로 날아간 시인은 어느덧 고고학 박사가 되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곳에 머물러 있다. 자신이 내뱉은 수많은 '말'에 갇혀버리는 것이 두려워 낯선 언어가 있는 곳으로 떠난 시인. 낯선 언어와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낯선 공부를 시작한 늙은 학생의 글은 차분하다.

도대체 무엇이 시인에게 몇천 년 전 유물을 발굴하여 연구하고 이미 죽어버린 문자를 배우는 일에 빠져들게 했을까. 나로서는 짐작이 가지 않는다. 소위 운명, 숙명, 팔자로 표현되는 그것인지 아니면 오래전부터 바라오던 일인지 알 수 없지만, 그로 인해 시인의 삶이 조금이라도 행복해졌다면 참 좋은 일일 것이다.

시인들의 글은 형식이 무엇이든 결국엔 시가 된다. 산문집이라 쓰인 이 책도 곳곳에 가 묻어난다. 군데군데 비어있는 여백까지 시적이다. 시인 허수경이 풀어내는 생각의 실타래는 아련하고 조용하다. 떠나온 곳과 떠나온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이 아련히 조용히 흐른다.

그리움의 크기는 기억의 크기와 비례하는지도 모르겠다.


가네쉬는 방해물들을 제거하는 신이며 그가 좋아하는 것은 달콤한 것들이다. 연구소가 있는 거리에 히말라야 근처에서 수입해온 물건을 파는 상점이 문을 열었을 때 새로 단장한 진열장 안에는 놋으로 만든 가네쉬가 앉아 있었다. 나는 마침 내 주머니에 들어 있던 초콜릿을 가네쉬에게 들이밀었다. 가네쉬가 나라는 인간 앞에 놓은 방해물들을 지울 리는 없겠지만 방해물들을 없앤다는 귀여운 힌두의 신이랑 나는 말을 트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지, 다음엔 꿀빵을 좀 사야겠구만! - P.20

밤에 강가에 나가면 강에서는 빛이 난다. 튀어오르는 물고기의 비늘빛이다. 나는 어릴때, 별들은 물 속에 살다가 하늘로 가는가, 하고 물었다. - P.53

"전쟁, 겁나니?" 전쟁을 겪어본 적이 없는 나는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아니." 그녀는 머리칼을 하나로 묶었다. "처음이 겁나... 전기가 나가는 첫날이 제일로 겁나는 날이야. 시체를 싣고 가는 지프를 처음 본 날, 군인들에게 윤간을 당한 여자들의 이야기를 처음 듣는 날, 그런 날들이 무서워. 엄마가 무너진 아파트 더미에서 못 나온 그날은 슬픈 날이었지 무서운 날은 아니었어..." - P.152

설자리를 잃어버린 지식층이 무기력하게 한쪽으로만 치달아가는 사람들을 허탈하게 바라보고 있던 시절. 그들의 웅변에 누구도 귀 기울이지 않은 시절.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자신들을 위로해주고 사회의 중요한 일원으로 끌어올려주는 나치의 편에 선 시절. 하나의 국가 시스템이 사람들의 감정을 건드리고 파고들어가 그 감정을 조직하고 조작하던 시절. 국가 시스템을 이끄는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서서히 타인과 나를 구별하는 공격적인 이데올로기가 일어나던 시절. 하프너는 그 시절의 자신을 담담히 들여다본다. 담담히 들여다보는 것만이 비이성의 시대를 탈출하는 열쇠인 것이다. 그 시절은 지나갔지만 상처는 남고, 일그러진 시대는 아직도 독일인들을 그 현장으로 불러내고 있으므로. 우리는 우리를 어떻게 들여다보고 있는가. 우리는 우리를 들여다보는 일에 게으르지는 않은가. - P.178~1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