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아는 못되지만 추리소설을 자주 읽다 보니 나름 취향이 생겼다. 상극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 별로인 건 서양 고전 추리 쪽인데 <Y의 비극>을 몇 개월 동안 붙잡고 있었을 때 제대로 질려버렸다. 비교적 최근에 나온 서양 추리소설은 그럭저럭 읽는 편이다. 한국 추리소설도 가끔 읽지만 아직은 부족한 느낌이다. 가장 취향에 맞는 건 일본 추리소설이다. 그중에서도 사회파 추리소설로 불리는 묵직한 작품들이 좋다. 시조격인 마쓰모토 세이초를 비롯하여 모리무라 세이치, 미야베 미유키, 다카노 가즈아키 등 좋은 글을 남기고, 쓰고 있는 작가들이 많다. 이번 리뷰의 주인공인 <기발한 발상, 하늘을 움직이다> 또한 사회파 추리소설로 분류된다. 시마다 소지라는 작가나 소설 자체에 대한 사전 정보 하나 없이 읽었는데 매우 만족스러웠다. 아무 생각 없이 샀던 책이 이렇게 가끔 얻어걸리게 되면 정말 기분 좋다.

1957년 눈보라 몰아치던 밤, 야행열차 안에서 기묘한 춤을 추던 피에로가 밀폐된 화장실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채 발견된다. 피에로의 시체는 잠시 화장실 문을 닫아둔 사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피에로는 누구이며 어디로 어떻게 사라진 것일까? 이것이 첫 번째 수수께끼다. 이야기는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1989년 도쿄 우에노로 이어진다. 부랑자 노인이 우에노에서 건어물 가게를 운영하던 여주인을 칼로 찔러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살인을 저지른 노인은 지저분한 길거리 부랑자 모습이지만 하모니카 연주를 아주 잘해서 게이세이 선 명물 할아버지로 불린다. 노인은 시종일관 변화 없는 표정에 말을 못하는 것은 아닐 텐데 입을 열지 않는다. 신분을 증명할 만한 건 하나도 없으며 쓰레기를 모아 판 돈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특기할 만한 점이라면 노인이 오래전 유아유괴 사건에 연루되어 26년간 옥살이를 하다 나왔다는 점이다. 그리고 노인이 옥중에 쓴 소설은 그가 절대 지능이 떨어지거나 치매에 걸린 것이 아니란 것을 증명해주고 있다. 담당 형사 요시키는 상사의 만류에도 굴하지 않고 부랑자 노인의 과거를 밝히는데 전력을 다한다.

32년의 차를 두고 벌어진 피에로의 죽음과 건어물 가게 여주인의 죽음 뒤엔 역사가 만들어 낸 형제의 비극이 있었다. 작가는 우선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할만한 수수께끼를 던져놓고 대역 요시키 형사를 통해 수수께끼를 풀어내고 있다. 수수께끼가 하나씩 풀릴 때마다 나에게도 묵직한 돌덩이가 하나씩 얹어지는 기분이었다. 소설 속 비운의 형제 여태영, 여태명은 사할린으로 강제 징용된 조선인 형제였다. 1910년 일본은 조선을 강제병합하고 토지조사사업을 벌이면서 조선인들의 토지를 빼앗고 소작인으로 전락시킨다. 이 과정에서 조선인 수백만 명이 고향을 떠나 국외로 강제 징용된다. 강제 징용된 조선인들은 위험한 공사 현장에서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으며 일본기업을 위해 일했으나 임금은 착취당하고 나중엔 학살까지 당한다. 소설 속 형제의 과거를 밝히는 작업은 동시에 일본의 잘못을 밝히고 고발하는 작업이기도 했다.

일본인 작가가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 징용'이란 소재로 소설을 썼다는 것 자체가 처음엔 놀라웠고 다음엔 고마웠고 나중엔 부끄러웠다. 정작 한국인인 나는 깊이 생각해본 적 없는 문제인데 일본 유명 작가가 부러 이런 소재를 택해 일본 사회에 직구를 던진 점은 존경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한국과 일본 양국 사이엔 지금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역사적 문제가 쌓여있다. 앞으로도 일본은 국가적인 입장에서 우리에게 정식적인 사과를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원인에는 일본의 잘못이 가장 크지만, 첫 단추를 잘못 끼운 우리의 잘못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재미와 작품성 모두 만족스러웠고 일본인보단 한국인에게 더 의미 있을 소설이었다. 한일 관계의 현실은 언제나 답답하지만 다카노 가즈아키나 시마다 소지처럼 바른 역사관을 가진 일본인들이 있다는 것에 가끔은 숨통이 트인다.


4층으로 가는 계단을 올랐다. 그리고 이번 사건이 자신에게 대체 무엇이었는지 생각했다. 여태영의 기발한 발상이 하늘을 움직였다. 아까 무심코 자신이 그렇게 말했지만 이 사건을 통해 하늘이 자신에게 뭔가를 이야기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지금은 충분히 알 수 없지만 아마 쇼와라는 시대, 그리고 일본인이 과거에 저지른 죄 혹은 지금도 계속 범하고 있는 죄 또한 이 인종의 본질 같은 것이 아닐까. 경찰관인 자신에게 이것을 깨닫고 그리고 파악하라, 하늘이 그렇게 재촉하는 느낌이 들었다. - P.507~508

수화기를 놓고 요시키는 사건이 정말 해결된 것일까 하고 생각했다. 한국에 아내가 있는 여태영은 아직 일본에 있다. 사할린에는 아직 4만 명 이상의 조선인이 남아 있다. 평소에는 생각한 적도 없었지만 40 몇 년 전의 전쟁과 일본인의 죄가 이 나라에서 아직 처리되지 않고 남아 있다. 전쟁의 죄일 뿐이라고 말해버리면 편하겠지만……. 사건에 깊이 관여하면 할수록 일개 형사의 무력함이 뼈저리게 느껴졌다. 요시키는 언제나 그런 기분에 사로잡혔다. - P.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