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선생이다 - 황현산

2015. 1. 27. 21:04



산문을 좋아하지만 문학평론가가 쓴 산문은 어려울거란 선입견 때문에 선뜻 손에 잡지 못했던 책이다. 살아가며 알게 모르게 저장된 선입견은 선택의 폭을 좁게 만들고 생각의 폭 또한 좁아지게 한다. 책을 고르는데도 선입견이란 필터를 한 번 거쳐야 하니 매번 비슷한 책만 읽게 된다. 의식적으로 시선을 돌려본들 결국엔 다시 돌아오고 만다. 하루아침에 달라질 수는 없으니 적어도 선입견이 편견으로 발전하지 않도록 주의해야겠다.

본문은 3부로 나뉘어 있는데 1, 3부는 짧게 써내려간 산문이고 중간 2부는 한 장의 사진과 그에 대한 글을 덧붙였다. 평범하게 시작한 글이 마지막엔 묵직한 돌덩이가 되어 가슴에 쿵 내려앉기를 여러 번이었다. 단 몇 줄의 글에 담긴 것이 너무나 많아 몇 번을 다시 읽어내려갔다. 본문 대부분이 칼럼에 실렸던 글이어서 한두 장에서 끝나니 다행이었지 조금만 더 길었다면 글을 읽다 숨이 막혔을지도 모른다. 가벼운 일상을 소재로 한 산문도 결코 가볍지 않았다. 저자의 글은 처음이라 잘 모르지만 가볍게 읽고 마는 글이 아니라 읽을수록 무게와 깊이가 더 해지는 글을 쓰는 듯하다.

시작은 순풍에 돛단 듯 순조로웠으나 2부에 가서 주춤한다. 2부는 강운구, 구본창 선생의 사진을 싣고 사진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형식인데 굉장히 지루했다. 사진 한 장을 놓고 그렇게나 깊은 사유(思惟)를 할 수 있다는 점은 놀랍고 감탄스러웠지만, 그 사유에 공감할 수 없어서 지루했다. 더 솔직히 표현하자면 작은 사진 한 장에서 보이는 것은 물론 보이지 않는 것까지 보다니 대단하다 싶다가도 한편으론 사진을 굳이 이렇게까지 세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나? 복잡하다. 피곤해. 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 전체와 어우러지는 사진을 선별하여 글과 함께 실은 거라는데 1, 3부와 흐름이 이어진단 느낌도 들지 않았을뿐더러 차라리 없는 편이 더 나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비교적 최근에 쓴 글이 모여있는 1부가 가장 좋았고 2부에선 한 번 맥이 끊겨 아쉬웠고 3부에선 마지막 글이 깊게 새겨졌다. 이 책만 보자면 조금 아쉬움이 남지만, 저자의 글은 감히 나 따위가 평가를 할 수 없을 만큼 훌륭한 것이었다. 개인적으론 조금 더 가벼운 글을 좋아하지만 가끔 이렇게 무게 있는 글을 읽으며 곱씹는 것도 나쁘지 않다. 담담하고 꾸밈없이 묵직하고 깊이 있는 문장들이 아름다웠다. 새로운 글로 새롭게 만났으면 좋겠다.


그래서 나는 요즘 대학생들의 편에서 박정희를 가장 훌륭한 대통령으로 존경한다는 말을 들으면 저 우체국 창구를 뛰어넘을 때와 같은 충동을 느낀다. 학생들의 입장에서라면, 한때의 압제와 불의는 세월의 강 저편으로 물러나 더이상 두려울 것이 없으니, 그렇게 어떻게 이루어졌다는 경제적 성과를 두 손으로 거머쥐기만하면 그만일 것이다. 과거는 바로 그렇게 착취당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눈앞의 보자기만한 시간이 현재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조선시대에 노비들이 당했던 고통도 현재다. 미학적이건 정치적이건 한 사람이 지닌 감수성의 질은 그 사람의 현재가 얼마나 두터우냐에 따라 가름될 것만 같다. - P.12

사람이 억울한 일을 당하면, 사람이 불타면, 사람이 어이없이 죽으면, 사람들은 자기가 그 사람이 아닌 것을 다행으로만 여길 것이다. 그러고는 내일이라도 자신이 그 사람이 될까봐 저마다 몸서리를치며 잠자리에 누울 것이다. 그것을 정의라고, 평화라고 부르는 세상이 올 것이다. 그 세상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기도 한 이명박 대통령이 누구보다도 잘 알 것이다. - P.33

교회 다니는 사람 몇 사람이 봉은사를 비롯한 여러 절에서 땅 밟기를 했다고 한다. 미얀마의 불교 사원까지 찾아가 그 일을 했다니 용맹하기도 하다. 땅 밟기는 구약에 그 근거가 있다는데, 그것은 방법에 해당할까 치성에 해당할까. 종교가 맞닥뜨려 싸워야 할 것은 다른 종교가 아니라 경건함이 깃들 수 없는, 그것이 아예 무엇인지 모르는 마음이어야 할 것이다. - P.66

역사는 과거와 나누는 대화라고 흔히 말한다. 유령의 역사와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다. 우리 시대의 편협한 주관성으로 역사의 입을 틀어막고도 대화를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더욱 위험한 것은 이번 국사 교육 번복 소동에서 보듯이, 역사의 입을 막았다 열었다 하며 그 눈치를 보는 사람들의 이상한 대화법이다.- P.79

삶을 깊이 있고 윤택하게 만들어주는 요소들은 우리가 마음을 쏟기만 한다면 우리의 주변 어디에나 숨어 있다. 매우 하찮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내 삶을 구성하는 것 하나하나에 깊이를 뚫어 마음을 쌓지 않는다면 저 바깥에 대한 지식도 쌓일 자리가 없다. 정신이 부지런한 자에게는 어디에나 희망이 있다고 새삼스럽게 말해야겠다.- P.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