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은 일 년에 한 번 담그지만, 책은 철도 가리지 않고 마구 사들여 먼지와 함께 푹푹 묵혀놓는다. 오래 보관한다고 더 재밌어지고 감동이 배가 되는 것도 아니거늘 항상 욕심 때문에 꺼내 먹는 속도보다 쟁여 놓는 속도가 더 빠르다.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이라니 도대체 뭐하는 북클럽인가 궁금해서 사들였던 이 책도 김치로 따지면 묵은지가 되었을 즈음 꺼내 읽었다. 누군가에게 읽혀야 하는 책 본연의 임무를 게으른 주인 덕에 이제서야 다했음이다. 지금도 내 책장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많은 책들에 그저 미안한 마음이다.

영국해협의 프랑스 노르망디 해안에 있는 여러 섬 중의 하나인 건지 섬은 세계 2차대전 당시 5년 동안 독일의 점령하에 놓이게 된다. 그 암울했던 5년간의 건지 섬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편지글 형식으로 풀어나가고 있는 책이다. 전쟁통에 인기를 얻은 작가이자 칼럼니스트인 줄리엣, 출판사 발행인 시드니, 시드니의 여동생이자 줄리엣의 절친한 친구 소피, 그리고 이 이야기의 진정한 주인공인 건지 섬 사람들이 서로 주고받은 편지글을 읽다 보면 저절로 건지 섬이 그리워진다.

어느 날 독일군의 눈을 속이고 몰래 돼지바베큐 파티를 하다 통금시간을 어기게 된 마을 사람들이 순찰대에게 발각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 자리에 있던 엘리자베스는 임기응변을 발휘하여 독서 토론이 길어져 통금 시간을 지키지 못했다고 둘러대고 위기를 벗어나게 된다. 이후 강제적으로 이어진 독서모임이 점차 제대로 된 문학회로 자리 잡게 된다.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이라는 이름은 먹을 것이 없으면 독일군이 불러도 가지 않는다는 윌 시스비라는 회원 때문에 문학회에 다과가 추가되고, 전쟁통에 먹을 것이 귀해 감자 알맹이가 아닌 껍질로 파이를 만들어 다 같이 나누어 먹었던 것에 유래한다. 요즘 표현으로 웃픈 유래가 있는 이름이다.

전쟁이 일어나도 삶은 이어진다. 어쩌면 '전쟁' 그 자체보다 전쟁이 일어나도 계속 이어지는 '삶' 자체가 더 괴롭고 비참한 거란 생각이 든다. 자유를 빼앗긴 건지 섬 사람들에게 엘리자베스는 특별한 존재였다. 엘리자베스는 현명하고 씩씩하고 용감했다. 의식이 깨어있으며 생각을 행동으로 옮길 줄 아는 사람이었다. 단 한 번도 엘리자베스가 직접 이야기에 등장하지는 않지만, 마을 사람들의 편지글 속에는 언제나 엘리자베스가 살아 있다. 줄리엣이 엘리자베스를, 그녀의 딸인 킷을 사랑하게 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로 느껴진다.

전쟁하면 떠오르는 비참함, 고통, 우울함은 이 책엔 없다. 대신 아름다움과 사랑, 희망이 있다.


그래서 제가 독서를 좋아하는 거예요. 책 속의 작은 것 하나가 관심을 끌고, 그 작은 것이 다른 책으로 이어지고, 거기서 발견한 또 하나의 단편으로 다시 새로운 책을 찾는 거죠. 실로 기하급수적인 진행이랄까요. 여기엔 가시적인 한계도 없고, 순수한 즐거움 외에는 다른 목적도 없어요. - P.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