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순간을 기록하는 사진의 자리를 손으로 쓱쓱 그려낸 스케치 그림이 채우고 있다. 스케치를 쭉 보다가 문득,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은 글씨도 잘 쓴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씨도 일단은 '그리는 것' 이어서 그런 걸까. 카메라 대신 스케치북과 펜만 들고 떠나는 여행이라, 내가 할 수 없는 일이어서 그런지 뭔가 멋지다.

브라질에 도착하자마자 벨렝의 시장통에서 칼을 든 무장강도 다섯 명에게 여권을 제외한 모든 소지품을 도둑맞는다. 아, 허망하여라. 동네에서 지갑을 잃어버려도 황망한데 하물며 이역만리 외국에서 모든 걸 잃은 여행자의 기분은 그야말로 좌절 그 자체일 것이다. 그나마 목숨과 여권은 사수했으니 불행 중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 걸까. 모든 것을 포기하고 돌아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부모님들 덕에 심기일전하여 다시 새로운 장소로 발을 옮긴다. 

브라질을 거쳐 칠레 이스터 섬에서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에 하나인 모아이 석상을 만난다. 난 호기심이 별로 없는 사람이지만 세계 7대 불가사의라던가 우리네 지난 역사만 봐도 신기한 게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사람보다 몇 백 배는 무거운 돌덩이를 어떻게 옮겼으며, 현대 기술로는 도저히 재현해 낼 수 없는 청자의 빛깔도 그렇고 우리가 '고도로 발달한 문명'이라 믿는 현재가 어쩌면 처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검은 선으로 이루어진 스케치는 내 눈엔 모두 멋지게만 보였고 글은 무심하리만치 담담했다. 미사여구도 없고 잘못하면 오히려 더 어색해지는 어설픈 유머도 없다. 온통 새로운 것들 사이에서 홀로 느끼는 외로움이 묻어난다. 분명 설렘도 있었지만 외로움의 농도가 더 짙게 다가온 책이었다. 익숙한 곳을 벗어나 더 넓은, 낯선 곳으로의 떠남은 사람을 좀 더 깊게 만든다. 어항이 커지는 만큼 열대어의 크기가 함께 커지듯이 사람도 많이 보고 많이 겪은 만큼 더 깊고 넓고 커지는가 보다.


유럽에서는 여행 중인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각자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할 기억들을 만들어가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다만, 어쩌면 내가 그들을 다소 피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에게 있어 여유는 한가한 해변에서보다 북적거리는 도시에서 더욱 짜릿하게 느낄 수 있다. 여행에 있어 포기할 줄 안다는 것은 꽤 유용한 기술이다. 내 앞에 놓인 서너 개의 선택 앞에서 하나만을 취하면서 다른 것들을 먼 훗날로 미룰 수 있는 여유가 치열하게 살아가는 우리나라 사람들과는 어쩌면 맞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인간사가 그러하듯 버린 만큼 얻을 수 있는 것이고, 가끔은 과감한 포기가 더 큰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믿는다. 나에게 여유는 그런 것이다. - P.3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