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한 삶이 아닌 '가족'을 위한 삶을 살았던 신희수는 서른 두 해만에 '나'를 위한 삶을 살아 보려 한다. 희수의 '나를 위한 삶', 그 시작점엔 두부와 라디오 그리고 이은세가 있다. 은세는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인디 가수이자 라디오 DJ다. 연약한듯하지만 심지가 굳고 단단한 여자 신희수와 차갑고 딱딱해 보이지만 실상은 여리고 말랑한 남자 이은세의 시시콜콜한 연애이야기 들어 보시렵니까?

버틴다는 말로밖에 표현할 수 없었던 12년간의 직장 생활을 그만두고 안식년을 맞이한 희수는 요즘, 평소 좋아하던 동네 두부 가게에 매일 아침 따끈한 두부를 사러 갈 수 있어서 행복하다. 두부 가게에 며칠 출근 도장을 찍다 보니 매일 마주치는 묘령의 남자에게 이상하게 눈길이 간다. 희수는 반 장난삼아 자신이 얼마 전부터 듣기 시작한 라디오 방송에 아침마다 마주치는 '두부남'에 대한 사연을 보내는데 신기하게도 바로 방송에서 읽히는 희수의 사연. 희수는 매일 아침 자신과 마주치는 두부남이 자신이 듣는 라디오 방송의 DJ와 동일인물일 거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다. 두부남의 사연을 두부남 방송에 보내서 두부남이 직접 읽게 됐으니 당사자인 두부남은 얼마나 즐거웠을까?!

소설 속 두 주인공을 맺어주는 역할로 등장하는 것이 두부인데 그 두부처럼 담백하고 잔잔한 이야기였다. 사랑 이야기 말고도 희수가 직장을 그만두고 자신의 미래에 대해 내내 고민하는 모습이나 누구나 안고 사는 가족과 친구에 대한 고민 또한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희수가 은세를 만나기 전부터 계획했던 여행을 계획대로 떠나는 모습도 보기 좋았다. 은세를 만나서 여행을 포기하고 안주하는 모습을 보여줬다면 신희수와 이 소설 자체에 실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서 좋았다. 사랑하는 사람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나 자신이라는 걸 확인 시켜 주어서 고마웠다.

약간은 얄미운 친구인 '민선'에게 은세의 표현을 빌리자면 '호구처럼' 잘 해주는 희수를 보며 저거 정말 호구 아닌가 싶다가도 결국엔 그 친구의 진짜 마음을 얻게 되는 걸 보면서 역시 진심은 통하는 건가 싶기도 했다. 내가 망설임 없이 끊어낸 과거의 인연들도 이해하고 참고 견디면서 계속 관계를 이어 갔다면 나도 희수처럼 그 사람들의 진짜 마음을 얻게 됐을까라는 생각도 해본다. 얻을 수도 있고 얻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아마도 난 그 과정을 견디지 못했을 거다. 난 나의 무언가를 희생해서 누군가의 마음을 얻는 데는 흥미도 없고 재주도 없고 애초에 그럴만한 그릇을 갖고 있지도 않다. 그래서 나라는 인간 자체도 내가 만든 인간관계라는 것도 편협할 수밖에 없다. 뭐든 인정하기까지가 어려운 거지 한 번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나면 그것만큼 마음 편한 일도 없다. 뭐가 어찌 됐든 내 마음 편한 게 최고니까.

저자의 글은 처음인데 글이 참 편하다. 어디 한 군데 모난 곳 없이 둥글둥글하고 막히는 곳 없이 시원해서 읽기 편했다. 폭풍처럼 격정적으로 몰아치는 사랑이 아니라 봄비처럼 잔잔하게 스며드는 사랑 이야기가 필요할 때 읽으면 좋을 책이다. 


"그 포도알 모으기, 엄청 열심히 했었어요, 난. 숙제도 열심히 하고, 발표도 열심히 하고, 청소도 열심히 하고. 포도알 얻는 건 정말 힘들고 지겨웠지만, 내가 뭔가를 열심히 해서 선물을 받을 수 있다는 게 좋았거든요. 은세 씨랑 이렇게 같이 있으면 색종이 포도알 모으던 시절이 생각나요. 지금까지 열심히 모은 포도알로 포도나무를 가득 채워서 선물을 받은 기분이에요."  - P.184

내 인생에서 가장 찬란했던 시간을 함께해 줘서 고마워요. 당신 덕분에 나는 살아온 날들이 후회되어도, 살아갈 날들이 두려워도 씩씩하게 현재를 살아갈 용기를 얻었습니다. - P.4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