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씨의 입문 - 황정은

2014. 3. 7. 21:40



<百의 그림자>로 처음 접한 황정은 작가의 글은 몽글몽글 부드럽고 따스한 무언가를 두 팔 가득 끌어안은 듯한 느낌이었다. 그 느낌이 좋아서 작가의 다른 소설집을 사 읽었으나 내가 찾아 느끼고자 했던 무언가는 다른 모습으로 나를 맞이했다. 부드러움과는 거리가 먼 거칠고 투박하고 폭력적이기까지 한 아홉 편의 단편들. 작가는 각각의 상황에 맞서는 인물들의 모습을 조용하고 덤덤하지만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발에 채이는 돌만큼 흔하고 돌아서면 잊을 만큼 흐릿한 인물들은 작가가 붙여준 짧고 단순한 이름 덕에 생명을 얻어 조금은 뚜렷해지고 덕분에 조금은 주인공다워진다. 솔직히 말하자면 등장인물을 지켜보는 작가의 시선은 따스했을지 몰라도 나에겐 아홉 가지 이야기를 읽는 내내 찬바람만 휑휑 불어왔다. <百의 그림자> 때처럼 따스한 온기와 그 뒤를 따라오는 약간의 쓸쓸함을 기대했었는데 너무나 있는 그대로의 날 것이어서 읽는 동안 외롭고 또 괴로운 소설집이었다.

많은 독자들이 황정은 작가를 '여자 박민규'라 칭하곤 하던데 작가의 소설집을 세 권쯤 읽으니 저 말에 어느 정도 수긍이 간다. 자신만의 독특한 언어 표현 방식을 가진 작가라는 점이 어딘가 닮았다. 그들의 글은 다소 적응기간이 필요하지만 어느 지점에선가 불이 탁 켜지고 나면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게 된다. 하지만 독특함은 쉽게 질리기도 한다. 맛이 진한 음식이 쉽게 질리는 것처럼 지나친 독특함은 독이 될 가능성도 크다. 약과 독 사이에서 적절히 균형을 잡는 일은 작가님들이 알아서 해주실테고 이번 <파씨의 입문>만을 놓고 보자면 나에겐 약보단 독에 더 가까웠다. 


애매한 것을 외우다 보면 외로운 것도 애매해지지 않을까. 세 개의 점이 하나의 직선 위에 있지 않고 면을 이루는 평면은 하나 존재하고 유일하다. 애매한 것을 멍하게 외우며 떨어지는 모습이란 아름답지 않다. 아름답다거나 아름답지 않다거나 봐줄 누군가도 없으므로 아름답지 않은 채로 떨어진다. - P.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