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유한 집에서 태어나 부족한 것 없이 자란 '윌 트레이너'는 한창 일과 연애에 빠져있을 시기에 불의의 사고로 사지 마비환자가 된다. '루이자 클라크'는 6년간 웨이트리스로 일하던 카페의 폐업으로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었다.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라도 (가족 중 제대로 경제활동을 하는 건 루이자뿐이었으니… 박복한 루!) 일자리가 필요했던 루이자는 윌의 6개월 임시 간병인으로 취직하게 된다. 이후부터는 누구나 예상 가능한 로맨스 소설의 전철을 밟는데 한 가지 달랐던 건 윌은 루를 만나기 이전부터 죽음을 결심하고 있었고, 루를 사랑하게 되지만 그의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 자신이 6개월 임시 간병인으로 고용됐는지 루가 진실을 알게 되는 순간부터 이야기의 분위기는 크게 달라진다. 루의 모든 감정선은 급작스럽지 않고 천천히, 넘치지 않고 덤덤히 진행되는데 그래서 더 슬프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죽음을 앞둔 순간까지 사랑하는 이의 꿈을 찾아주려 노력하는 윌 같은 남자는 찾기 어렵겠지만, 루는 왠지 친근하게 느껴져서 쉽게 감정 이입을 할 수 있었다. 죽음을 이야기하지만 삶이 있고, 슬프지만 미소 짓게 되는 소설. 마음에 든다.

스위스의 디그니타스병원은 조력자살(안락사)을 원하는 외국인을 받아주는 세계 유일의 병원이라고 한다. 책을 읽고 검색해서 실제 안락사 과정을 담은 영상을 보는데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안락사에 대해선 찬반 의견이 팽팽하지만, 개인적으론 불치병에 걸려 오랜 시간 고통받으며 죽어갈 것이 분명한 사람들에겐 필요한 선택지라고 생각한다. 나아질 희망도 없이 매일 고통 속에서 지내는 것이 과연 제대로 된 삶이라 할 수 있을까. 숨 쉬는 것조차 돈이 들고, 고통이 수반되는 사람들에게 '그래도 살아라.'라고 말하는 건 산 자의 이기심에 불과하다. 죽음은 절대 가볍게 다뤄서는 안 되는 문제지만 살아있는 것이 곧 죽음과 같은 사람들에겐 선택지를 주어도 되지 않을까 싶다.

오랜만에 읽는 로맨스 소설이었는데 사랑은 물론이고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새로운 세상에서 당신은 약간 편치 않은 느낌을 갖게 될지도 몰라요. 사람이 안전지대에서 갑자기 튕겨져 나오면 늘 기분이 이상해지거든요. 하지만 약간은 들뜨고 기뻐하길 바랍니다. 그때 스쿠버 다이빙을 하고 돌아왔을 때 당신의 얼굴이 내게 모든 걸 말해주었어요. 당신 안에는 굶주림이 있어요, 클라크. 두려움을 모르는 갈망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당신도 그저 묻어두고 살았을 뿐이지요. 고층 건물에서 뛰어내리거나 고래들하고 수영하라는 얘기는 아니에요. (당신이 그런다면 내심 좋아하겠지만.) 그게 아니라 대담무쌍하게 살아가라는 말이에요. 스스로를 밀어붙이면서. 안주하지 말아요. (중략) 여전히 가능성이 있다는 걸 알고 사는 건, 얼마나 호사스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 가능성을 당신에게 준 사람이 나라는 것만으로도, 어쩐지 일말의 고통을 던 느낌이에요. - P.533~5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