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시대를 배경으로 박지원, 홍대용, 박제가, 이덕무 등 젊은 실학자들의 이야기를 한 소설가의 죽음과 연관 지어 추리 형식으로 풀어낸 소설이다. 조선 최고의 매설(소설)가 청운몽은 연쇄 살인의 범인으로 몰려 서대문 안 저잣거리에서 사지를 찢겨 죽는다. 청운몽을 잡아들이고 형을 집행한 이는 의금부 도사 이명방으로 출신으로 보나 타고난 능력으로 보나 흠잡을 곳 없는 엘리트 공무원이다. 청운몽의 죽음 이후 이명방이 형제처럼 지내는 야뇌 백동수를 통해 백탑파를 만나게 되면서부터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연쇄살인범으로 몰려 능지처참을 당한 청운몽의 무죄를 주장하는 백탑파와 위험을 무릅쓰고 사건을 재조사하기 시작하는 이명방, 밝혀지는 진범과 그 배후는 누구일까.

살인 사건의 범인과 배후를 찾는 추리가 흥미롭긴 하지만 그보다 흥미로운 건 백탑파 실학자들이다. 여러 쟁쟁한 서생 중에서도 가장 눈길이 가는 건 역시 '김진'이었다. 백탑파에서 가장 어린 그는 다방면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인물인데 이명방과 함께 살인 사건의 범인을 쫓는 과정에서도 제갈공명과 셜록 홈즈를 합쳐 놓은 것 같은 신묘한 능력을 발휘한다. 곁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 이명방은 물론 나까지도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철저한 고증으로 새롭게 되살아난 백탑파 젊은 서생들은 마치 그 시절 실제 그들을 보는 듯 생생했고 그들이 나누는 대화는 여러 번 곱씹어 생각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소설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부분 또한 등장인물들 간의 '대화'였다. 마치 지식인들의 고차원적인 대화를 엿듣는 기분이었는데 전부를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잘 갈무리하여 계속 들여다보고 싶은 대화였다. 말과 글은 시대에 따라 변화하기 마련이지만 가볍게 내뱉는 말과 쉽게 쓰인 글이 넘치는 요즘에 비하면 그들의 말과 글은 얼마나 기품 넘치는 것인지 새삼 감탄스럽기도 했다.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쓴 글을 좋아하는 편이라 재밌게 읽을 수 있었던 소설이었다. 김탁환 작가의 소설 중엔 백탑파 시리즈가 가장 유명하다는데 첫 단추를 끼웠으니 나머지 시리즈도 차례로 읽어봐야겠다. 예전에 영화로 봤었던 <조선 명탐정 - 각시투구꽃의 비밀>도 소설로 읽어 보고 싶다. 쉽게 읽힐듯하지만 결코 쉽지 않은 점이 매력적이고 역사와 추리 속에서 재미와 지식을 함께 얻을 수 있는 소설이란 점도 매우 마음에 든다.


이덕무가 어리석은 학동을 깨우치는 훈장처럼 하나하나 설명했다. "진정한 벗 한 사람을 얻게 된다면 십 년 동안 뽕나무를 심고 일 년간 누에를 쳐서 오색 실에 물을 들이겠소. 열흘에 한 빛깔씩 만들어 쉰 날 동안 모두 다섯 빛깔 실을 준비하겠소이다. 이 실들을 다시 봄볕에 쬐어 말린 다음 아내에게 그 벗의 얼굴을 수놓게 하겠소. 귀한 비단으로 장식하고 고옥(古玉)으로 축을 만들어 높은 산과 아득히 흘러가는 강물 그 사이에 펼쳐 놓고 마주 보며 한나절 말없이 있다가 황혼이 들면 품에 안고 돌아오고 싶소이다. 청운몽은 내게 그런 벗이었다오." - P.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