百의 그림자 - 황정은

2013. 12. 7. 20:37



은교와 무재는 지은지 사십 년 된 전자상가 건물에서 일한다. 도심 재개발 때문에 많은 상점이 문을 닫고 떠났지만 둘은 아직 그곳에서 일하며 그곳에서 사랑을 키워간다. 평범한 두 사람이 나누는 일상적인 대화는 꾸밈이 없어 담백하다. 아무런 간도 하지 않은 보들보들하고 따스한 순두부 같은 대화다. 처음엔 다소 심심하지만 지날수록 고소함이 입안 가득 퍼지는 순두부처럼 은교와 무재의 사랑도 그렇다. 다만,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그림자가 다소 불안한 느낌이다. 부디 어둠에 물들어 그림자가 완전히 일어나지 않기를, 일어난다 하더라도 그림자를 따라나서질 않기를 바래본다.

글은 처음부터 많은 것이 생략되어 있다. 친절히 하나부터 열까지 설명해주지 않으며 비어있는 여백을 채우는 건 우리의 몫이다. 모든 것이 확실치 않고 두루뭉술하지만 글 전체를 감싸고 있는 조용하고 착한 분위기 때문인지 불친절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오히려 비어 있음이 더 어울리는 소설이다. 현실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아날로그적인 사랑과 조용하고 착하고 예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한편으론 사랑스럽고 한편으론 너무나 쓸쓸해 보여서 한 번 꼭 끌어안아 주고 싶어진다. 이토록 보호본능을 불러일으키는 글이라니 낯설지만 사랑스럽다. 百의 그림자이자 白의 그림자였던 온기 가득한 소설.

유독 글에서 자신만의 색이 강하게 느껴지는 작가들이 있는데 황정은 작가도 그렇다. 내게 이 소설은 순백의 이미지로 남는다. 몽글몽글 따스하고 부드러운 순두부 같다가도 어느 순간 흰 눈처럼 차가운 쓸쓸함이 만져지고 채워지지 않은 하얀 여백이 여운을 남긴다. 온통 하얗고 부드럽고 따스하고 조용하고 착하다. 그래서 감싸 안아주고 싶어진다.


마뜨료슈까는요, 라고 무재 씨가 강판에 무를 갈며 말했다. 속에 본래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알맹이랄 게 없어요. 마뜨료슈까 속에 마뜨료슈까가 있고 마뜨료슈까 속에 다시 마뜨료슈까가 있잖아요. 마뜨료슈까 속엔 언제까지나 마뜨료슈까, 실로 반복되고 있을 뿐이지 결국엔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있던 것이 부서져서 없어진 것이 아니고, 본래 없다는 것을 확인한 것뿐이죠. 무재씨, 그건 공허한 이야기네요. 그처럼 공허하기 때문에 나는 저것이 사람 사는 것하고 어딘가 닮았다고 늘 생각해 왔어요. - P.141~1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