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머릿속에 한니발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아마도 영화 <양들의 침묵> 일 거다. 영화를 제대로 본 적 없는 나 같은 사람도 대략적인 줄거리와 두 주연 배우를 알고 있을 정도이니 그 유명세가 대단하지 싶다. 그 유명세 때문에 한니발 원작 시리즈 중에서 가장 궁금했던 소설이기도 했다.

<레드 드레곤>에서 윌 그레이엄이 이빨 요정을 잡기 위해 한니발의 도움을 청한다면, <양들의 침묵>에선 FBI 연수생 클라리스 스탈링이 버팔로 빌을 잡기 위해 한니발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감옥 안에 있어도 사그라지지 않는 한니발의 인기라니. 그들을 한니발이란 괴물에게 인도하는 건 언제나 잭 크로포드다. 드라마 <한니발>의 영향인지 난 여전히 잭 크로포드에게 정이 안 간다. 사실 한니발 시리즈에서 가장 정이 가는 인물은 한니발 렉터다. 정이라기보단 호기심, 흥미로움이란 단어가 더 적합하겠지만. 계속 알고 싶고 더 알아내고 싶은 마음이 무섭고 혐오스럽고 거부하고 싶은 마음을 억눌러버린다. 소설 속에서도 다수의 정신학 박사들이 한니발을 연구하겠다고 나서는데 그 마음이 어떤 것인지 알 것도 같다.

버팔로 빌의 범죄 대상은 몸집이 큰 여성으로 살인 후 가죽을 벗기고 목에 고치상태의 나방을 넣어 여러 장소에 유기한다. 스탈링은 한니발에게 버팔로 빌을 잡을 수 있는 단서를 얻으려 하고, 한니발은 단서를 주는 대신 스탈링 자신의 이야기를 듣길 원한다. 스탈링은 어린 시절 아버지의 죽음 이후 고아가 되어 겪었던 일들이 트라우마로 남아 줄곧 양 떼의 울음소리를 듣게 된다. 그런 그녀가 버팔로 빌을 잡고 양들의 침묵을 얻을 수 있도록 하는 데 가장 큰 도움을 주는 사람이 연쇄살인범인 한니발 렉터라는 사실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스탈링에게 상징적인 아버지 역할을 하고 있는 잭 크로포드와 한니발 렉터. 그녀는 선을 상징하는 아버지 잭에게 수사를 배우고 악을 상징하는 아버지 한니발에게서 유년기의 상처를 치료받는다. 그들이 스탈링에게 끼치는 영향은 각기 다르지만, 스탈링에게 중요한 존재라는 사실만은 분명해 보인다.

스탈링의 무의식 속에 도사리고 있던 유년기의 외상을 알아채고 진단과 처방까지 내린 한니발을 보면서 나도 상담 좀 받아보고 싶단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한니발이 살인 + 식인을 일삼아서 그렇지 아주 능력 있는 정신과 의사가 아니던가. 무례하게 굴지만 않는다면 고기가 되어 박사님 식탁에 오르진 않을 거 같은데 말이지. 이상 쓸데없는 망상이었다.

스탈링이 한니발과의 만남으로 완벽한 양들의 침묵을 얻을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어서 <한니발>을 읽자.


"그러면 반쯤 허물어진 아치를 수리해야 하지 않겠어? 그러니까 이 사건 기록을 가져가. 내게는 더 이상 필요 없으니까." 렉터 박사는 창살 사이로 팔을 뻗었다. 순간 스탈링의 손가락이 박사의 손가락 끝에 닿았다. 그의 눈 속에서 별안간 딱 소리가 난 것 같았다. "고마워, 스탈링." "고마워요, 박사님." - 2권 P.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