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니발 원작 소설 중에서 가장 최근에 출판된 것이 창해에서 나온 2006년도 판인데 지금은 절판 상태에 중고로도 구할 길이 없어서 90년대에 나온 오래된 구판을 샀다. <레드 드래곤>, <양들의 침묵>, <한니발>까지 샀고 한니발의 어린 시절을 다루고 있다는 <한니발 라이징>은 워낙 평이 안 좋아서 패스했다. 한니발 시리즈의 첫 번째 <레드 드래곤>은 무려 91년에 출판된 책이었는데, 아무래도 22년 전 번역이다 보니 지금 나오는 번역서처럼 세련된 맛은 없었지만, 그 나름의 둔탁하고 고전적인 느낌도 나쁘지 않았다.

<레드 드래곤>은 윌 그레이엄이 한니발 렉터를 검거하고 난 후의 이야기다. 한니발 렉터가 처음 등장하는 소설이지만 그는 이미 감옥에 갇힌 상태다. 그리고 FBI 특별 수사관 윌 그레이엄은 한니발 검거 이후 바닷가로 내려가 요양 중이다. 하지만 일가족을 무참히 살해하는 연쇄 살인 사건이 발생하고 잭 크로포드는 윌을 다시 FBI로 불러들인다. 보름달이 뜨는 날이면 아름다운 부인이 있고, 남편, 아이, 애완동물을 기르는 부유한 가정만을 찾아 엽기적인 살인을 일삼는 연쇄 살인범을 잡기 위해 윌은 한니발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레드 드래곤의 연쇄 살인범 통칭 이빨 요정, 자칭 위대한 붉은 용 '프랜시스 달러하이드'는 어린 시절 할머니에게 받은 학대 때문에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살다가 시인이자 화가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위대한 붉은 용과 태양을 입은 여자'라는 그림을 접한 이후로 스스로 붉은 용이 되고자 살인을 저지르기 시작한다. 이 사람 인생도 참 기구하다.

잠정적인 피해자 가족과 자신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 이빨 요정을 잡아야 하는 프로파일러 윌 그레이엄, 붉은 용이 되고자 했던 연쇄 살인범 프랜시스 달러하이드, 연쇄살인범을 사랑한 시각장애인 여성 리바 매클레인, 기사를 위해서라면 물불을 안 가리다가 끔찍한 최후를 맞게 되는 기자 프레디 라운즈, 윌을 자기 편할 대로 이용해 먹는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던 FBI 국장 잭 크로포드, 그리고 분량은 적지만 묵직한 존재감을 느낄 수 있는 한니발 렉터. 아무리 봐도 악마에 가까운 한니발 캐릭터는 정말 매력적이다.

드라마와 비교해가면서 읽는 재미가 쏠쏠했던 책이었는데 생각보다 대사나 장면을 원작에서 가져온 경우가 많았다. 드라마에서 가장 강렬했던 장면이 한니발이 카펫 위를 신발 벗고 양말만 신은 채 걷는 장면이었는데 원작에도 있는 장면이었다. 퓰러가 아주 깨알같이 원작 활용을 했지 싶다. 한니발 시리즈가 원작보다 영화가 낫다는 평가를 받는 몇 안 되는 작품 중의 하나라는데 영화를 제대로 본 적 없는 나는 소설도 재미있게 읽었다.

지금은 <양들의 침묵>을 읽고 있는데 박사님께서 클라리스는 윌만큼 괴롭히시진 않는 것 같다. 윌=자신이라서 더 괴롭히는 걸까. 박사님의 속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원작에서의 칠튼은 매우 rude 해서 짜증 난다. 무례함을 싫어하는 박사님께서 2권에서 요리해 주시려나. 살인을 요리라고 표현하는 걸 보니 한니발에 너무 빠져있는 것 같다. 드라마도 이번 주면 끝나고 책도 곧 다 읽을 테니 다시 정상적으로 돌아오겠지. 관심은 움직이는 법이니까.


그레이엄은 살인을 이해했다. 그렇지만 마음이 편한 상태에서 이해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인류의 거대한 몸체 속에서, 우리 스스로가 컨트롤하는 사악한 부추김과 그러한 부추김의 어둡고 충동적인 지식이 마치 무력화 된 병균처럼 작용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레이엄은 오래되고 무서운 그러한 부추김이 백신을 만드는 병균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다. 그는 실로를 잘못 이해했던 것이다. 실로는 귀신에 씐 것이 아니었다. 귀신에 씐 것은 인간이었다. 실로는 다만 무관심한 것이다. - P.424~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