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 단편 소설이라고 얕잡아 봤다. 분량이 적다고 더 쉽게 읽힌다는 보장은 없거늘 하루키 소설을 너무 쉽게 봤다.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소설과 수필의 호불호가 극명히 갈리는 작가가 또 있을까? 아직 나에겐 하루키 말고는 없다. 그 유명한 <상실의 시대>는 너무 어릴 때 읽어서 내용이나 느낌은 기억에서 사라진지 오래고 그나마 괜찮게 읽은 소설이 <해변의 카프카> 정도다. 그나마 괜찮았다는 거지 이 소설 역시 좋았던 건 아니다.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니 하루키 소설을 읽을 때의 나는 오감을 상실한 인간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멀리하고 있었는데 몇 년 만에 다시 도전한 단편집에서 또 한 번 쓴맛을 보게 될 줄이야. 인터넷 서점 소개 글에 따르면 이 책에 실린 여섯 개의 단편은 '상실과 소멸'에 대해 하루키 특유의 투명하고 감각적인 문체로 이야기하고 있다고 한다. 투명한 문체는 둘째치고 상실과 소멸? 정말 모르겠다. 나에겐 그저 '고통과 번뇌'를 가져다준 소설이었다. 중고로 사둔 하루키 소설이 몇 권 더 있는데 이제 더는 그의 소설을 읽을 엄두가 안 난다. 누가 나에게 하루키 소설을 선물한다면 '이 사람이 나를 싫어하나?'라는 생각이 들 것 같다. 나는 그의 수필만을 사랑할 운명인가 보다. 이제 운명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할 때다.


"있잖아요, 제가 질문이 너무 많나요?" 소녀는 이렇게 말하며 선글라스 너머로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니?" 나는 물어보았다. "가끔요." "질문하는 건 나쁜 게 아냐. 질문을 받으면 상대도 뭔가를 생각하게 되니까."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아요." 소녀는 발끝을 보면서 말했다. "모두 적당히 대답할 뿐이에요." - P.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