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01월 독후감

2020. 2. 7. 20:41


01.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 김수현 / 마음의 숲 / E

원래 이런 책 잘 안 읽는데 1년 독서의 시작을 가볍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해서 전자도서관에서 빌려봤다. 요즘 유행하는 내용도 없이 뻔한 이야기만 늘어놓는 에세이는 아니었고 나름의 철학과 생각이 녹아 있었다. 하지만 깊은 사유를 할 정도는 아니어서 서른 살 이전의 사회초년생들이 읽으면 좋지 않을까 싶다. 얼마 전,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영향인지 독자들이 점점 쉬운 글만 찾고 서사에 꼭 필요한 갈등을 참지 못하며 하루빨리 주인공이 먼치킨이 되어 사이다를 주는 내용을 원한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이런 현상은 비단 웹소설에만 국한된 것이 아닌 모든 문학 장르 전반에서 나타나고 있다. 장기적으로 볼 때 공급은 수요를 따라갈 수밖에 없는데 이런 식이라면 질 높은 글이 비주류가 되는 날이 머지않아 보인다.

우리는 완벽한 것을 동경하고 완벽하지 않은 것을 사랑한다.



02. 천 개의 찬란한 태양 / 할레드 호세이니 / 현대문학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선택할 수 없는 성별 때문에 죽을 때까지 차별받고 학대받으며 사는 인생에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원래도 무신론자이지만 이런 이야기를 접할 때마다 더더욱 신의 존재를 부정하게 된다. 신이 있다 한들 이런 사태를 방조하기만 하는 존재는 신이라 불릴 자격이 없다. 아이러니한 건 여성을 차별하는 그들은 맹목적으로 신을 숭배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끔찍이 여기는 신은 여성을 가축처럼 여겨도 자신만 믿으면 다 용서해주는 모양이다. 사람을 죽여도 기도하고 회개하면 천국에 간다는 그네들과 결이 같다. 이야기 속, 점점 최악으로 치닫는 여인들의 삶을 바라보며 분노를 넘어선 무기력감을 느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영화 <쇼생크 탈출>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희망은 좋은 것이며 좋은 것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때론 희망은 잔혹한 고문이 되어 상처만 남기기도 한다. 그래도 인간은 희망 없인 살 수 없으니 끊임없이 상처받으면서도 끊임없이 다시 일어선다. 그 지난한 투쟁으로 세상이 조금은 나아지길 바라며.

"내 딸아, 이제 이걸 알아야 한다. 잘 기억해둬라. 북쪽을 가리키는 나침반 바늘처럼, 남자는 언제나 여자를 향해 손가락질을 한단다. 언제나 말이다. 그걸 명심해라, 마리암."



03. 다윈 영의 악의 기원 / 박지리 / 사계절 / E

국가의 핵심 권력을 가진 이들이 사는 최상위층 거주 구역 1지구, 60년 전 12월의 폭동의 대가로 국가에게 버림받은 이들이 사는 최하위층 거주 구역 9지구. 1지구부터 9지구까지 나눠진 계급사회가 배경인 소설이다. 소설의 주인공은 할아버지부터 시작되는 '영' 집안의 남자들이다. 12월의 폭동으로 9지구 출신이지만 1지구에 정착하게 된 '러너 영', 문교부 차관이자 프라임스쿨 위원장인 아들 '니스 영', 프라임스쿨에 다니는 모범생 손자 '다윈 영'. 아버지 러너를 지키기 위해 범죄를 저지른 아들 니스는 30년 동안 죄책감에 시달리며 괴로워한다. 우연히 아버지 니스의 범죄 사실을 알게 된 다윈은 홀로 깊은 고민에 빠진다. 이 소설의 백미는 순수함 그 자체였던 소년이 아버지를 통해 처음으로 악을 접하고, 갈등과 고뇌 끝에 자기 나름의 결론에 다다르는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는데 있다. 자신 또한 아버지와 같은 악을 저지름으로써 그를 이해하고 새로운 다윈 영으로 태어날 수 있었던 아들. 다윈의 최종 선택은 용서할 수는 없지만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피는 물보다 진하며 인간은 자신의 이익 앞에선 그 무엇보다 이기적이며 잔인해지니까. 자기 색이 뚜렷한 글이라 반가웠는데 저자가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다고 한다. 새로운 글을 만날 수 없음이 매우 아쉽다. 늦었지만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정상이 아닌 산등성이는 그대로 완전합니다. 만개하지 않은 꽃은 그대로 완전합니다. 날개를 접고 쉬고 있는 새는 그대로 완전합니다. 여러분이 남몰래 알 수 없는 불안과 시련을 겪고 있다 해도 역시 그대로 완전합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내일을 위해 희생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매순간, 여러분은 더 이상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게 완성되어 있습니다. 오늘을 놓치지 않길 바랍니다."



04. 28 / 정유정 / 은행나무

연말에 <진이, 지니>를 괜찮게 읽어 저자의 책이 또 있나 살피다 집어 든 책인데 개를 통해 전염된다고 추측되는 '인수공통전염병'이 소재였다. 눈이 빨갛게 변하고 나흘이 지나면 사망하는 전염병 때문에 폐쇄된 도시 '화양', 저자는 그 안에서 생사를 다투는 인물과 동물을 조명한다. 인간이 극한의 상황과 마주했을 때 벌어질 수 있는 일의 대부분이 소설 속에서 일어난다. 살인, 강도, 강간, 약자와 동물 혐오, 나만 아니면 된다는 이기주의까지. 아무 죄 없이 죽어야 했던 개들이 불쌍했고 아무 죄 없이 강간당한 여성이 불쌍했고 아무 죄 없이 가족을 잃은 소방관이 불쌍했다. 모두 아무 죄가 없어 불쌍했다. 나 또한 같은 상황에 놓인다 해도 그들과 다르지 않을 거란 걸 알기에 더 쓰라리고 아팠다. 의도하고 읽기 시작한 건 아니었는데 시기와 딱 맞아떨어져 공포가 배가 됐던 소설이었다. 저자 소설에 연속적으로 동물이 비중 있게 등장하는데 어떤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던 건지 궁금해진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인간과 동물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어 좋았다.

화양에서 일상을 앗아간 세상은 화양을 잊은 것 같았다. 죽은 자를 땅에 묻듯, 시간과 망각 속에 화양을 매장해버린 후 자신들의 일상을 영위하고 있었다. (중략) 당연한 얘기지만 '그날 새벽'에 대한 이야기는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날 새벽, '700미터 구간'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진상이 밝혀지려면 기나긴 세월이 지나야 할 터였다. 바깥세상 사람들은 그 일을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야 마음이 편할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