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안에서

2019. 7. 13. 14:23



"언제나 꿈꿔온 순간이 여기 지금 내게 시작되고 있어. 그렇게 너를 사랑했던 내 마음을 넌 받아주었어. 오! 내 기분만큼 밝은 태양과 시원한 바람이 내게 다가와 나는 이렇게 행복을 느껴."

몸에서는 퀴퀴한 냄새가 나고 맘속에선 미풍이 불던 우리의 여름. 창문 너머론 거대한 초록이 넘실거리고, 그 시절 대중에게 사랑받던 젊은이 둘이 '나 더 이상 무얼 바라겠니'라 노래하고 있었다. 대걸레와 빗자루를 든 그애와 내 머리 위론 일본 애니메이션에 나올 것 같은 하얀 뭉게구름이 흘러갔고, 힙합 문법에 맞게 사회비판에 맞게 사회비판을 일삼던 두 가수는 그때만큼은 서정적인 멜로디에 몸을 맡긴 채 지금이 참 좋다고, 젊어서 참 기쁘다는 식의 가사를 읊고 있었다.

"하늘은 우릴 향해 열려 있어. 그리고 내 곁에는 네가 있어. 환한 미소와 함께 서 있는 그래 너는 푸른 바다야."

<여름 안에서>의 멜로디와 가사에는 그날 우리 머리 위에 뜬 뭉게구름과 닮은 낙관주의가 스며 있었다. 그리고 나는 거기 담긴 자족적인 느낌이 마음에 들었다. 그때가 아니면 가져볼 수 없는 충만함이었다.

지금도 듀스의 <여름 안에서>를 들으면 열다섯, 이마에 좁쌀 여드름이 잔뜩 난 내 얼굴과 교실 바닥을 비질하던 뒷모습이 떠오른다. 이따금 내 뒤에 다가와 제 키를 재보고 좋아하던, 이제는 피곤한 얼굴의 도시노동자가 되어 있을 한 남자아이도. 그 애도 이제는 나처럼 예전보다 모든 일에 재미를 덜 느끼고 또 덜 놀라는 어린이 돼 있을지 모르지만. 그래서 그 시절이 행복했니? 물으면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다'라고 대답할 것 같지만. 단지 모두가 '키 크는 무렵'이었다는 이유만으로 돌이켜보면 이렇게 아련해지고 마는 것이다. 그건 아마 그때 내 예만한 살갗 위로 내려앉은 햇빛과 바람을 먹고, 서툴고 어색하게 주고받은 눈빛 안에서 내가 어른이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10여 년이 지난 오늘 오랜만에 <여름 안에서>를 들으며 다시 이 글을 쓴다. 겨울을 대비하며, 곧 추위와 함께 들이닥칠 가사의 시간을 준비하며, 많은 동식물들이 열렬히 번식 중일 계절, 여름 안에서. 나보다 앳된 친구들에게, 어서 이 여름을 가지라고. 이건 아무나 가져도 되는 여름이라고. 너는 푸른 바다야, 조그많게 속삭이며 말이다.

- 김애란 <잊기 좋은 이름> 중에서



김애란 작가의 첫 산문집을 읽다가 글이 좋아 일부를 옮겨적어 봤다. 짧은 글을 순식간에 읽어내린 후 여름 안에서를 틀어 놓고 다시 한번 천천히 곱씹어 읽었다. 때론 시각보다 청각과 후각이 더 강력한 기억 소환 장치가 되곤하는데 작가에게 듀스의 여름 안에서는 열 다섯, 여름, 뭉게구름, 교실, 청소시간, 남자아이였다. 2019년 여름, 열 다섯 그 날의 기억은 글이 되어 누군가의 추억을 소환하고 있다. 바스락 거리는 햇빛 아래, 파란 하늘 하얀 뭉게구름이 유유히 흘러가는 모습을 보며 이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잠시나마 모든 것이 반짝반짝 행복해보인다. 안타깝게 일찍 떠나버린 듀스의 그도 이 노래처럼 행복했으면 좋겠다. 아껴 읽느라 이제 반정도 읽었는데 이렇게나 어여쁜 문장이 가득한 책은 오랜만이다. 소설, 산문 모두 마음에 드는 한국 작가는 김영하정도 였는데 한분을 더 알게 되어 몹시 기쁘다. 아무 얘기나 좋으니 산문 많이 써주셨으면 좋겠다. 사족 하나를 붙이자면 책에는 노래 가사가 ('너를'이 '나를'로 실림) 잘못 실려서 맞는 가사로 고쳐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