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독후감

2018. 1. 9. 20:24


01. 피프티 피플.e - 정세랑

창비 블로그에 5개월 동안 연재되었던 글을 한 권의 책으로 묶었다. 수도권에 위치한 어느 대학병원을 중심으로 50명의 사람이 저마다의 사연을 풀어낸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유가족, 층간소음 문제, 성 소수자, 낙태와 피임 등 각 이야기 속 주인공에게 닥친 현실적인 문제와 고민은 나의 이야기이자 당신의 이야기이자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작가의 유쾌하고 재밌는 글도 좋았지만, 이 소설처럼 따뜻한 시선으로 사람들의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글도 정말 좋다. 등장 인물이 정확히 50명은 아니라는데 그게 무슨 상관이랴, 이렇게 따스한데... 정말이지 정세랑 작가는 사랑할 수밖에 없다.


02. 바다는 창문을 열고.e - 기진

어린 시절 바닷가에서 만났던 신희와 정아는 14년 후 어른이 되어 다시 바닷가에서 만난다. 이재하 문학관의 직원이 된 정아와 동네 보건소 의사인 이신희. 신희가 먼저 마을에 자리 잡고 정아가 문학관에 일하러 오면서 두 사람이 재회하게 된다. 신희는 보자마자 그녀를 알아보지만 어릴 적 기억과는 동떨어진 신희의 성격 때문인지 정아는 그를 기억하지 못한다. 여차여차하여 정아도 신희를 알아보게 되고 우여곡절 끝에 서로 사랑하게 되는 당연한 스토리. 특별한 건 없는 평범한 사랑 이야기였는데 바다가 배경이어서 그런지 읽는 내내 시원한 기분이 들었다.


03. 블랙코미디.e - 유병재
남을 (특히 약자를) 깎아내려 웃기려 드는 이 나라의 개그를 혐오한다. 그래서 적절할 선을 지킬 줄 아는 유병재식 유머가 좋다. 이 책은 짧은 농담 글을 모은 에세이집인데 글은 짧지만 묵직하게 울리는 무언가가 있다. 글을 잘 쓰려면 책을 많이 읽고, 글을 많이 써야 하는 건 기본이고 그밖에도 여러 비법이 난무한다. 하지만 내가 내린 결론은 타고난 재능의 여부가 99%다. 글쓰기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가 그렇다. 재능이 없어도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재능을 가진 이를 따라잡을 순 없는 것이 현실이다. 야속한 유전자로다. 작가의 재치 넘치는 글을 읽으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각설하고, 분량은 적지만 오래 생각하게 만드는 좋은 책이었다. 종이책으로 샀어야 했는데 이북으로 사서 안타깝다.


04. 스팅.e - 아게하

라디오 방송 PD 장유원, 헤어디자이너 원장 문태라. 직업만 놓고 보자면 무난하게 만나 사랑에 빠질듯하지만 유원과 태라 모두 상처가 깊은 사람이다. 두 사람은 가장 사랑하고, 사랑받아야 할 대상인 가족에게 큰 상처를 받았다. 그 상처를 딛고 두 사람이 서로를 인정하고 사랑하기까지가 주된 내용이다. 내내 차분한 분위기를 풍기는 성숙한 성인남녀의 사랑 이야기여서 어둡고 우울한 이야기를 싫어하는 분들에겐 권하고 싶지 않다.


05. 나를 보내지 마 - 가즈오 이시구로

오래전에 사둔 책인데 작가가 노벨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읽기 시작했다. 사서 바로 읽지 않으면 이런 계기라도 있어야 묵혀둔 책을 읽게 된다. 복제 인간을 소재로 한 소설인 걸 알고 읽기 시작했는데도 초반엔 이게 대체 어떻게 흘러가는 이야긴지 가닥이 잡히지 않았다. 계속 읽어나가다 보니 '헤일셤'이란 곳은 복제 인간에게도 영혼이 있다는 것을 알리려고 노력한 그나마 양심 있는 기관이었다. 하지만 인간들이 지능적인 복제 인간에 대해 공포를 품게 되면서 후원이 끊기고 결국 문을 닫게 된다. 오로지 장기 기증을 위해 복제 인간을 만드는 인간들의 끔찍하고 추악한 이기심, 계속되는 수술을 이기지 못해 결국엔 숨을 거두는 것으로 짧은 생을 마감하는 복제 인간들의 모습. 글은 내내 파도 하나 일지 않는 바다처럼 잠잠했는데 읽는 내 속이 내내 시끄러웠다. 잘 읽히지도 않고 재미도 없었지만, 의미는 있었던 소설이었다.


06. 덧니가 보고 싶어 - 정세랑

회사에 다니면서 틈틈이 소설을 쓰는 재화와 경비업체 직원 전남친 용기 그리고 또라이 스토커 이야기다. 재화는 소설집을 내기 위해 그간 썼던 원고를 하나씩 검토하는데 검토가 끝날 때마다 소설 속 문장이 용기의 몸에 문신처럼 새겨지는 초자연적인 현상이 발생한다. 물론 재화는 몰랐고 당사자인 용기도 처음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용기의 7살 어린 여자친구가 몸에 새겨진 글귀를 발견하고 검색을 해본 순간 용기는 전여친을 잊지 못해 그녀의 글을 몸에 새기는 또라이로 전락하고 만다. 이 소설이 정세랑 작가의 첫 장편이라고 하는 데 아주 흥미진진하고 재밌었다. 제목에 등장하는 덧니는 매우 큰 역할을 하는지라 리뷰에선 일부러 뺐다. 궁금하면 직접 읽어보시라. 덧니 하니까 말인데 인간을 창조한 누군가가 내 눈앞에 있다면 평생 두 번밖에 나지 않는 치아와 생리, 임신, 출산을 체력 약한 여자가 하도록 만든 걸 따지고 싶다. 유치가 빠지면 평생 딱 한 번 밖에 나지 않는 치아라니 너무 비효율적이지 않은가. 하긴 창조주의 입장에선 인간이 삼사십 년 적당히 살다 죽도록 하드웨어를 만들었는데 자기들 맘대로 의학을 발전시켜서 100세 시대를 외쳐대니 황당할 수도 있겠다. 그런 창조주의 입장을 생각해서 치아는 그렇다 쳐도 생리, 임신, 출산을 여자가 하게 한 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넘쳐나는 건 힘밖에 없는 남자가 하던가 아니면 생리는 똑같이 하고 임신은 랜덤으로라도 하게 만들었어야지. 그것도 싫으면 남녀 체력 차이를 없애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창조주도 남자임엔 틀림없다. 아, 이 책 리뷰도 산으로 갔구나.


07. 지구에서 한아뿐 - 정세랑

지구에 사는 한아는 의상디자인학과를 나온 후 친구와 함께 친환경 의류 리폼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이게 의외로 수요가 있어서 벌이는 쏠쏠한 편이다. 그런 한아에겐 경민이라는 10년 된 남친이 있다. 이 남친님은 취직도 안 하고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모은 돈으론 여행을 다니는 데 다 써버리는 그야말로 대책 없고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다. 한두 번 가는 여행도 아니고 이번엔 캐나다에 간다는 경민을 쿨하게 보내고 일상으로 돌아온 한아에게 캐나다에 소형 운석이 떨어지면서 큰 폭발이 있었다는 뉴스가 들려온다. 바로 경민에게 연락했지만 경민은 연락 두절. 며칠 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경민은 한아 옆으로 돌아오지만 묘하게 착실하고 지나치게 달콤해졌다. 얼마후 경민인듯 경민 아닌 경민같은 그의 정체가 외계인임이 밝혀지는데!!! 줄거리는 여기까지. 처음엔 인간이 아닌 외계인이라고 해서 놀랐지만 나중엔 한아가 부러울 뿐이었다. 지구가 아니라 우주에서 한아뿐이었던 외계인의 사랑. 부럽다 부러워. 정세랑 작가의 톡톡 튀는 상상력을 만날 수 있는 글이었고 역시 재밌었다. 작가님 글을 다 읽어버려서 이젠 읽을 게 없는데 신작 좀 내주세요.


08. 시녀 이야기 - 마거릿 애트우드

21세기 중반, 전 세계가 전쟁과 환경 오염 등으로 혼란 상태에 빠진다. 그 틈을 타 가부장제와 성경을 근본으로 한 전체주의 '길리아드'가 국가를 장악하는 데 성공한다. 길리아드는 여성들을 여러 계급으로 분류하여 통제하는데 임신 가능 여부에 따라 '하녀', '아주머니', '시녀', '아내' 등으로 분류하여 각 가정에 배급한다. 가족과 함께 평범하지만, 행복한 삶을 살던 오프브레드는 어느 날 갑자기 이름과 가족을 뺏긴 채 사령관의 시녀가 되어, 삼엄한 감시 속에 그의 아이를 수태하도록 강요받는다. 상상만으로도 기괴하고 숨 막히는 설정인데 읽으면 읽을수록 더 끔찍했다. 소설에서의 여성은 인격체가 아닌 애 낳는 기계일 뿐이다.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면 폐기 처분되는 기계와 다를 바가 없다. 읽는 내가 여성의 입장이라 그런지 지금까지 읽었던 디스토피아 소설 중에서 가장 끔찍했다.


09. 낙연.e - 박소연

가상 시대물로 철저한 계급사회 안에서 계급을 넘나드는 사랑을 나누는 주인공들의 이야기다. 설정이나 내용은 괜찮았는데 표현력이 조금 떨어진다고 느꼈다. 그중에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버릇처럼 계속 나오는 '입술을 깨문다'라는 표현이 제일 거슬렸다. 나중엔 하도 입술을 깨물어서 등장인물들의 입술이 온전한지 걱정스럽기까지 했다. 거의 종교에 가까운 '륜'의 사랑이 헛되지 않아 다행이긴 했는데, 전체적인 글의 분위기상 열린 결말이나 새드 엔딩 쪽이 더 어울린단 생각이 들었다. 좋은 재료를 사용했지만 맞지 않는 조리법으로 100%의 맛을 끌어내지는 못한 요리 같은 글이었다.


10. 이토 준지의 고양이 일기 욘&무.e - 이토 준지

호러 만화 작가 이토 준지가 그린 고양이 만화가 있다고 해서 읽어봤다. 어느 날 부인님이 부모님 집에서 키우던 고양이 '욘'을 데리고 오더니 혼자 있으면 외롭다고 '무'까지 입양하게 된다. 졸지에 두 마리 고양이를 키우게 된 이토 준지는 툴툴거리면서도 부인님의 지시에 따라 캣타워를 조립하고 스크레치 방지용 비닐도 착착 붙인다. 부인 말을 잘 듣는 모습이 참 바람직했다. 호러 만화가답게 부인님은 눈동자 없이 흰자만 희번득하게 나오고, 고양이 또한 지옥에서 막 소환된 모습이었지만 사실적인 묘사 때문인지 거북하진 않았다. 특히, 욘의 자는 모습을 그린 건 사진하고 똑같아서 한참 깔깔거리며 웃어댔다. 어쩜 고양이는 못생기면 못생긴 데로 귀엽고 사랑스러운지 모르겠다. 분량이 적다는 게 유일한 단점인 만화책이었다. 크레마 사운드로 처음 만화책을 본 거였는데 만화를 보기엔 화면이 작다고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