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크리모사 - 윤현승

2016. 3. 10. 16:08



이 책이 만약 하나의 공연이었다면 손바닥이 아프도록 박수를 치던가 목이 터져라 앵콜을 외쳤겠지만 그럴 수 없어서 안타까웠다. 독서는 철저히 혼자만의 행위라서 작가에게 즉각적이고 적극적인 반응을 전달할 수 없는 것이 가끔은 아쉽게 느껴진다. 특히, 이렇게 마음에 드는 책을 만났을 땐 더욱 그렇다. 정말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한 번 펼치면 좀처럼 덮기 어려울 만큼 흡입력이 대단한 책이었다. 실제로 초반에 딱 한 번 끊고 이후론 새벽까지 이어서 읽었다. 초저녁잠이 많아서 새벽까지 뭘 하질 못하는데 뒷 내용이 궁금해서 도저히 덮고 잘 수가 없었다. 한번 시작하면 끝을 봐야 하는 책이다.

이탈리아의 한적한 시골 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하고 있는 루카르도에게 어느 날 갑자기 인류의 종말을 막으라는 중대한 임무가 맡겨진다. 나 같으면 '어디서 약을 팔아요?' 를 외치며 퇴근이나 했겠지만, 딸을 가진 그에겐 선택권이 없었다. 인류의 종말을 막기 위해선 요르겐의 예언서에 나오는 '부활의 때를 결정짓는 자', '부활을 돕는 자', '부활을 막는 자' 이 세 명의 정체를 밝히는 것이 최우선 과제이다. 등장인물과 각각의 역할이 처음엔 분명하게 보이는 듯하지만, 확신은 금물이다. 결과적으로 인류는 생존했고 루카르도도 살아남았지만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책을 좋아하는 도서관 사서이자 마지막까지 딸을 지키려 노력한 인간 루카르도가 한없이 가여워지는 이야기였다.


판타지 소설은 고등학교 다닐 때 가장 많이 읽었었고, 최근에 보는 건 오기로 읽고 있는 <묵향> 정도밖에 없다. 그래서 작가 이름도 책 제목도 처음 들었는데 판타지 소설계에선 유명한 작가이신가 보다. <하얀 늑대들>이 가장 유명한 거 같은데 찾아보니 권수가 만만치 않다. 판타지 소설이나 대하소설처럼 권수가 많은 책은 쉽게 손이 안 가는 게 문제다. 초반 진입 장벽이 너무나 높다. 이렇게 단 권으로 돼 있으면서 작품성까지 뛰어난 판타지 소설은 좀처럼 만나기 어렵다.


"천사라는 게 어느 쪽 종교에서는 악마의 형상일 수도 있죠. 제 친구는 새를 무지 무서워해서 깃털 날개 달린 천사도 자기한테는 괴물이나 다름없다던걸요. 기독교가 묘사하는 사탄이란 존재도 결국 여호와를 유일신으로 만들기 위해 모든 다른 종교의 신을 악마로 바꿔 버리려는 노력이잖습니까? 수메르 토속 신의 몸뚱이를 하고 그리스 올림포스 신의 무기를 들고 이집트의 율법을 강조하는 존재를 사탄이라고 결정짓는 거죠." - P.92

"넌 결국 누구냐?" 루카르도는 점점 꺼져 가는 불꽃의 조명 아래에서 귀밑까지 찢어지는 미소를 보였다. "전 다섯 번째 입니다." 티에로는 놀라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그저 조용히 고개만 끄덕이고 한쪽 눈을 감았다. 루카르도는 그의 이마에 댄 손을 살짝 눌렀다. 꺼지는 촛불처럼 조용히 그의 숨이 빠져나갔다. 그리고 다시 어둠이 안을 채웠다. - P.4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