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만 번 산 고양이>의 사노 요코가 이런 기가 막힌 수필을 썼을 줄이야. 왜 그동안 아무도 나에게 알려주지 않은 걸까? 세 권짜리 시리즈 수필인데 세 권 다 사는 건 모험인듯하여 제일 평도 좋고 인기 많아 보이는 거로 한 권만 샀다. 책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노년의 소소한 일상 기록'정도 되겠다.

글 몇 꼭지만 읽어봐도 사노 요코는 온갖 '척'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란 걸 알 수 있다. 그 점이 아주 마음에 든다. 무엇 하나 꾸미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삶. 때론 거칠다 못해 위험하다 싶을 때도 있는데 그게 또 매력이다. 글을 읽다 보면 나이가 들어 늙어 간다는 것에 대해 서글픈 감정이 든다. 아직 쌩쌩한 마음과 늙어빠진 몸의 부조화도 괴롭고 날로 늘어가는 건망증에 치매 걱정까지 해야 하니 노인의 삶도 결코 녹록지가 않다. 연배가 있으셔서 그런지 가끔 고리타분한 이야기를 열심히 늘어놓으실 때도 있는데 그 정도는 너그럽게 이해하자. 우리도 언젠간 그렇게 늙을 테니.

읽으면서 가장 재밌었던 글은 단연 한류 이야기였다. 한류 이야기 때문에 독후감을 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처음엔 겨울연가 욘사마로 시작했다가 다른 한국 드라마를 보게 되고 점점 다른 배우들에게까지 빠져드는 걸 보면서 팬질의 메커니즘은 만국 공통이란 진리를 다시금 깨닫게 됐다. 욘사마 때문에 남이섬 여행까지 오게 된 사노 요코의 마음과 일본 아이돌 콘서트를 보기 위해 도쿄로 향했던 내 마음은 아마도 크게 다르지 않았으리라. 어느 순간 그 달콤했던 사랑의 콩깍지도 벗겨졌지만, 그들을 사랑했던 순간만큼은 누구보다 행복했으니 그것으로 된 것 아닐까.


그 어떤 젊은이의 일상보다 들여다보는 재미가 있었던 노년의 일상이었다.


7시 반에 눈을 떴다. 기분이 몹시 나쁘다. 오늘은 완전히 재수 옴 붙은 하루가 될 듯한 예감이 든다. 몸 어딘가가 아프거나 열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단지 기분이 안 좋을 뿐이다. 아침에 상쾌하게 벌떡 일어나는 사람들의 기분을 모르겠다. - P.27

이 드라마를 보지도 않은 사람들은 "일본 드라마 <당신의 이름은>이랑 똑같은 거 아냐?"라며, 다 안다는 듯한 표정으로 노골적인 경멸을 드러내지만 당치도 않은 소리다. <당신의 이름은>은 남녀 주인공이 엇갈려서 애간장이 타지만, <겨울연가>로 말하자면 아아, 여기서 욘사마가 나타나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헬리콥터를 타고 왔는지 어깨에 날개가 돋아 날아왔는지 여자로부터 10미터 떨어진 곳에서 안경 너머 혼신의 힘을 담은 눈빛으로 훌륭한 머플러를 두르고 서 있는 거다. 그것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나타난다. 그러면 스토커 남자는, 그는 또 어디서 나타난 건지 건물 구석이나 나뭇가지 뒤에서 얼싸안은 둘을 지켜보고 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줄곧 지켜본다. '이봐, 알겠지? 이제 그만 단념하라고!'라는 마음이 들지만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서른여섯 해 동안 일본에 쌓인 원한을 잊어주는 민족이 아니다. - P.116

그러나 한국 드라마는 근본적으로 어딘가 다르다. 이 행복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스토리도 대부분 억지로 짜 맞춰서 개연성이 없다. 보고 있으면 헛웃음이 나온다. 그런데도 행복하다. 엄청나게 행복하다. 잘난 사람들은 모두 이 현상을 분석하려 들지만 나는 그러지 않는다. 좋아하는 데 이유 따위 없다. 그저 좋은 것이다. - P.126

주름이 자글자글한 남동생에게 물어보았다. "워드프로세서 써?" "아, 예전엔 썼는데 지금은 컴퓨터만 써." 말문이 막혔다. "나는 글씨를 못 써서 말이야, 그게 편하더라고." 화가 불끈 치밀었다. "이것 봐, 유미가 신혼여행 가서 문자 보냈어." '나는 결혼해서 집에서 탈출했는데 아빤 불쌍하게 그 여자랑 평생 같이 살아야 되겠네'라고 말이야. 에헤헤헤." 그 여자라는 건 친엄마다. 훌륭한 가족이다. 아름다운 부녀다. - P.146

나는 깨달았다. 사람을 사귀는 것보다 자기 자신과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더 어렵다는 사실을. 나는 스스로와 사이좋게 지내지 못했다. 그것도 60년씩이나. 나는 나와 가장 먼저 절교하고 싶다. 아아, 이런 게 정신병이다. - P.187

예순여덟은 한가하다. 예순여덟은 찾는 이가 아무도 없다. 예순여덟의 할머니가 무얼 하든 말든 관심을 두는 사람은 없다. 외롭냐고? 농담 마시길. 살날이 얼마 없으니 어린아이처럼 살고 싶다. 생각해서는 안 될 일을 생각하고 싶다. - P.191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근처 재규어 대리점에 가서, 매장에 있던 잉글리시 그린의 차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거 주세요." - P.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