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간에선 '세계 3대 디스토피아 소설'로 예브게니 이바노비치 자먀찐의 <우리들>, 조지 오웰의 <1984>,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꼽고 있다. 자마찐의 <우리들>은 20세기 디스토피아 소설의 효시 격이라는데 내가 어려워하는 러시아 작가여서 아직 읽어보지 못했다. 생각보다 쪽수도 적고 출판사가 열린책들이니 도전해봐도 괜찮을 것 같다. 각설하고 <1984>와 비슷할 것으로 생각하고 읽은 <멋진 신세계>는 그보다 훨씬 더 암울하고 끔찍했다. 비단 내용뿐만 아니라 번역도 그러했는데 때문인지 지루한 부분이 많아서 읽는 데 오래 걸렸다.

멋진 신세계 속 인간은 인공수정으로 유리병에 배양되어 생명을 얻는다. 부화병은 컨베이어를 타고 이동하며 각각의 계급에 맞는 유전자 조작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인간은 다수의 피지배자와 소수의 지배자로 나뉘며 개개인의 개성과 감정은 소멸한다. 각 계급에 맞는 신체적, 정신적 기능을 가진 인간을 대량 생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죽도록 즐기기>의 저자 닐 포스트먼의 글을 빌려오자면 <1984>의 인간은 고통의 지배를 받으며 <멋진 신세계>의 인간은 쾌락의 지배를 받는다. 한마디로, 오웰은 우리가 증오하는 것들이 우리를 몰락시킬 것을 두려워했고, 헉슬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이 우리를 몰락시킬 것을 두려워했다. 닐 포스트먼은 이 책에서 오웰보다 헉슬리가 옳았을 가능성을 이야기 하고 있는데 나 또한 그의 의견에 동감하는 바이다. <죽도록 즐기기>도 제대로 한 번 읽어봐야 겠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건 생각하는 힘인데 그것을 잃은 인간을 인간으로 불러야 하는지조차 의문이다. 소설 속의 인간은 겉모습은 인간이지만 생각도 감정도 없으니 쇳덩이로 만들어진 로봇과 다를 바가 없다. 현대 사회에서도 지배자들이 원하는 피지배자의 모습은 이 소설에 나온 '감정 없는 로봇 인간'이란 생각이 든다. 그들은 불평불만 없이 일 잘하고 돈은 적게 받아가는 인간을 원한다. 최소의 투자로 최대의 효과 이상을 바라는 것이다. 정말 양심도 없다.

어떤 갈등이나 괴로움, 고통 없는 인생을 살지만 내 인생의 주인이 내가 아니게 되는 것과 수많은 갈등과 괴로움을 겪지만 내 인생의 진정한 주인이 되는 것 이 두 가지 중 어느 쪽의 삶이 더 나은 걸까? 머리로는 내 인생의 주인은 내가 되어야 하며 그것이 진정한 인간으로서의 삶이란 생각을 하지만, 한편으론 이런저런 괴로운 일을 겪는 것보단 사회 속 수많은 부품 중 하나가 되어 걱정 없이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든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인간으로 사는 건 괴롭다.


"때로 나는 과학이 그리울 때가 있어. 행복이란 아주 귀찮은 주인이야 - 타인의 행복은 더욱 그렇더군. 사람이 행복을 아무 말없이 받아들이도록 훈련되지 않은 경우에는 진리보다도 더 섬기기 어려운 주인이야." - P.2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