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온다 - 한강

2014. 12. 10. 22:02



철저한 고증과 취재를 바탕으로 1980년 5월 18일부터 열흘간 있었던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상황과 남겨진 이들의 이야기를 써내려간 소설이다. 그동안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책을 읽다 보니 내가 알고 있었던 건 수박 겉핥기에 불과했다. 클릭 몇 번으로 찾아지는 검색 결과가 아닌 희생자의 입장에서, 남겨진 사람들의 입장에서 들려주는 진짜 그들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는 소설이다.

에필로그를 제외한 본문은 190페이지 남짓으로 많지 않은 분량이다. 하지만 한 장 한 장이 너무나 무겁다. 담담한 문장은 피로 얼룩져 눈물을 흘린다. 그들의 피와 눈물을 닦아주고 차디찬 손발을 보듬어주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 그래서 더 미안하고 아프고 슬펐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렇게 글로나마 그들을 떠올리고 가슴에 담아 기억하는 일뿐이다.

독일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을 주장하면서 '다른 사람의 처지를 생각할 줄 모르는 생각의 무능은 말하기의 무능을 낳고 행동의 무능을 낳는다.'고 했다. 34년 전 5·18도 지금의 세월호도 모두 그 생각의 무능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싶다. 이미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존엄성마저 무너지고 있는 이 나라에서 생각하는 힘을 잃지 않는 것이 가능한 일인지 잘 모르겠다. 가능하다 해도 그것이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다. 윗물이 썩어 악취가 진동하는데 아랫물만 맑아진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래도 최소한 우리가 지금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민주주의라는 것이 누구의 희생이 바탕이 되어 이루어진 것인지는 잊지 말고 살아야 할 것이다. 우린 그들에게 아주 큰 빚을 진 채 살고 있으니까.


네가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다. 네가 방수 모포에 싸여 청소차에 실려간 뒤에. 용서할 수 없는 물줄기가 번쩍이며 분수대에서 뿜어져나온 뒤에. 어디서나 사원의 불빛이 타고 있었다. 봄에 피는 꽃들 속에, 눈송이들 속에. 날마다 찾아오는 저녁들 속에. 다 쓴 음료수 병에 네가 꽂은 양초 불꽃들이. - P.102~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