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 독후감
2018.01.26 19:49


01. 스토너 - 존 윌리엄스

이 소설을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담담하게 이어지는 지난한 삶의 기록쯤 되겠다. 주인공 윌리엄 스토너는 농부의 아들로 자랐고 농업을 배우기 위해 대학에 진학한다. 하지만 스토너는 영문학개론 수업을 들은 후 문학에 매료되어 농업을 버리고 영문학도의 길을 선택한다. 스토너가 19살에 미주리 대학에 들어가 영문학도부터 시작해서 영문학 교수가 되어 생을 마감할 때까지의 일생을 담담한 문체로 써 내려간 소설이다.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고 선택한 학문의 길에선 다행히 성공하여 교수 자리에 오르고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대학에서도 가정에서도 그의 위치는 불안하기만 하다. 대학 교수 정도면 성공한 인생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찬찬히 들여다보니 그렇지만도 않았다. 이 소설이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는 이유는 특별하지 않음에 있다고 생각한다. 나처럼 실패하고 나처럼 고민하고 나처럼 별거 아닌 것 같은 스토너를 보며 위안을 얻는 것인지도 모른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말처럼 스토너의 인생도 나의 인생도 특별할 것 없이 이어지는 것이다. 죽는 그 순간까지.


02. 마왕.e - 이사카 코타로
소설은 형 안도의 이야기를 담은 '마왕'과 동생 준야의 이야기를 담은 '호흡'으로 나뉘어 있다. 준야의 호흡보단 안도의 마왕 쪽 이야기가 더 좋았다. 형 안도에겐 30보 안에서만 상대방의 입에서 자신의 의도하는 말이 나오게 하는 초능력이 있고, 동생 준야에겐 10분의 1의 확률 안에서만 경마에서 이기는 초능력이 있다. 혼란하고 부정적인 기운만 가득한 시대, 강력한 지도자를 원하는 국민의 앞에 개혁을 부르짖는 정치가 이누카이가 나타난다. 이누카이는 "5년 안에 내가 이 나라를 제대로 만들어 놓지 못한다면, 내 목을 쳐도 좋다!"라고 외치며 국민을 현혹한다. 형 안도는 그런 이누카이와 이누카이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지지자들의 집단행동을 보며 불안함을 느낀다. 커다란 벽과 같은 이누카이에 맞서 자신의 초능력으로 홀로 싸우다 쓰러진 형 안도. 자신의 생각을 믿고 대결해 나가면 세상은 바뀐다고 믿었던 안도. 안도처럼 행동하는 사람들 덕분에 아주 느리긴 해도 분명 세상은 조금씩 바뀌고 있다. <몬스터 콜스>에서 삶은 생각이 아닌 행동으로 쓰는 거라던 주목나무의 말이 다시금 떠오르는 소설이었다.


03. 별을 따라서 - 피어 H.레이놀즈
우리들의 삶엔 수많은 이정표가 존재한다. 어떤 이정표를 따를지는 본인의 선택에 달렸다. 다른 사람들이 갔던 안전하고 편한 길을 뒤따라 갈 수도 있고, 누구도 가지 않은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 나갈 수도 있다. 이 책은 많은 사람이 걸었던 길이 내 길이 아닐 수도 있다는 진리를 아름다운 우화를 통해 전달하고 있다. 삽화나 글의 분위기가 어린 왕자를 떠오르게 하는 동화책이었고, 한글 본문 뒤엔 영어판도 있어서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 되는 아이들이 읽으면 좋을 것 같은 책이었다.


04. 비밀의 숲 테라비시아 - 캐서린 패터슨
미국 아동문학의 고전으로 손꼽히는 명작으로 시골 소년 제시와 도시에서 전학 온 소녀 레슬리의 우정과 이별, 둘만의 비밀 왕국 테라비시아에서 펼쳐지는 환상의 세계를 그린 작품이다. 동화책을 비롯한 소위 아동 도서를 읽다 보면 생각보다 잔인하고 충격적인 장면이 많아서 놀랄 때가 있다. 이 책에서도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하루아침에 죽고 마는데 아이들이 이런 글을 읽고 충격을 받진 않을까? 유명한 아동 도서 중의 하나인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에선 주인공이 학대 당하고 친하게 지내던 아저씨마저 죽는데 이런 글을 아이들이 읽는다고 도움이 되는 걸까? 이해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어린 왕자> 또한 아동 도서는 아니란 생각이 든다. 어린아이들도 죽음에 대해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연습을 해야 한 다는 건 알지만, 굳이 책으로 읽어 가면서까지 충격을 받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요즘 아이들은 뭐든 빠르고 영악하다지만 그래도 아이는 아이일 뿐이다. 그들의 순수함을 되도록 오래 지켜 주는 것이 어른들이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싶다.


05. 유혹하는 글쓰기.e - 스티븐 킹
모든 것은 호불호가 갈린다. 스티븐 킹의 글은 내겐 호!호!호!다. 책의 앞부분엔 작가의 어린 시절부터 작가로 성공하기까지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부분이 좋아서 작가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를 내준다면 정말 재밌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설마 이미 나와 있는 건 아니겠지?! 어린 시절 스티븐 킹의 어머니는 꼬마 스티븐이 소설을 하나 완성할 때마다 25센트 동전을 주었다고 한다. 지금의 대작가 스티븐 킹을 만든 건 어머니가 쥐여준 25센트의 힘일지도 모른다. 후반부엔 본격적으로 글쓰기에 대한 조언이 나오는 데 그리 딱딱하거나 어렵지 않아서 이 부분도 재밌게 읽어 내려갔다. 스티븐 킹의 책을 그리 많이 읽진 않았지만 읽는 책마다 재밌었다. 제일 좋아하는 건 <쇼생크 탈출>의 원작 소설인데 생각난 김에 주말에 다시 읽어봐야겠다. 종이책으로 샀어도 후회하지 않을만한 책이었다.


06. 바깥은 여름.e - 김애란
김애란 작가의 책은 두 권을 읽었으나 두 권 모두 그럭저럭 이었다. 이 책도 좋다는 소리에 팔랑대는 귀를 잠재우지 못하고 읽어봤다. 모두 일곱 편의 단편이 실렸는데 참 우울하다. 전에 읽었던 <쇼코의 미소>와 어딘가 닮아 있는 글이었다. 쇼코의 미소가 잘 읽히긴 하지만 취향이 아니었다면 이 책은 잘 읽히지도 않고 취향은 더더욱 아니었다. '우울한 한국문학 싫어병'에 걸렸는지 이제 우울한 글을 읽으면 지겹다는 생각부터 든다. 당분간 우울한 한국 문학은 멀리해야겠다.


07. 해가 지는 곳으로.e - 최진영
정체불명의 바이러스로 인해 전 세계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혼란의 시대. 살아남은 사람들은 살기 위해 더 나은 장소를 찾아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떠난다. 어디가 더 안전한지 과연 안전한 곳이 있기나 한지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불안하다. 이런 최악의 상황에서도 서로를 소중히 여기며 사랑할 줄 아는 소녀들의 모습에선 성스러움까지 느껴졌다. 소녀 '도리'와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도리의 동생 '미소'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내내 우울하고 슬펐다. 죽음이 언제 손 내밀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어린 소녀를 보고 발정하는 더러운 남자들의 모습은 역겨웠고, 도리와 지나의 사랑은 그 순수함의 농도만큼 슬펐다. 그렇게 나쁘진 않은 글이었는데 우울함에 질려있어서 후한 점수는 못 주겠다.


08.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e - 데이비드 발다치
미식축구 경기 중에 부상으로 쓰러진 후 과잉기억증후군(hyperthymesia)에 시달리고 있는 남자 '에이머스 데커'. 그는 부상 이후 모든 것이 힘들었지만 경찰이 되어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하지만 그가 행복해지려는 순간 누군가 아내와 아이를 처참히 살해한다. 그로부터 2년 후 세바스찬 레오폴드란 남자가 경찰서에 제 발로 찾아와 자기가 2년전 살인 사건의 범인이라고 자수한다. 하지만 데커의 기억 속엔 세바스찬 레오폴드에 대한 기억은 없다. 데커는 본능적으로 그가 범인이 아님을 확신한다. 세바스찬 레오폴드의 자수 이후 이어지는 살인 사건 해결을 위해 경찰에선 데커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데커는 경찰 그리고 FBI 요원과 함께 범인을 추적해 나간다. 살인 사건의 범인 찾기보단 과잉기억증후군에 시달리는 데커가 너무 불쌍했던 소설이었다.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단 하나도 잊지 않고 기억한다니, 인간이 24시간 돌아가는 CCTV도 아닌데 얼마나 몸에 무리가 가고 피곤할까. 인간에게 있어 망각의 힘이 얼마나 중요한데 그걸 박탈당한 삶이라니 안타까울 뿐이었다. 소장용까진 아니고 킬링타임용으로 빌려 보면 좋을 책이다.


09. 여름, 어디선가 시체가.e - 박연선
첩첩산중 두왕리 아홉모랑이 마을에 사는 강두용 할아버지는 막장 드라마를 보던 중 뒷목을 잡고 쓰러져 생을 마감한다. 남편이 죽고 시골에 혼자 남게 된 홍간난 여사를 걱정한 아들딸들은 백수 손녀 강무순을 당분간 시골집에 떨궈 놓기로 결정하고 튀어버린다. 휴대폰도 안 터지고 갈 곳도, 할 일도(농사 빼고) 없는 시골에 홀로 남겨진 무순은 15년 전 마을 소녀 네 명이 같은 날 실종되어 돌아오지 않은 미해결 사건에 대해 듣게 된다. 경찰과 과학수사대도 해결하지 못한 사건을 백수 강무순이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조용한 시골 마을에 무려 네 명의 소녀가 한날에 사라진 사건을 추적하는 것도 즐거웠지만 등장인물이 내뱉는 사투리가 정말 매력적이었다. 영화와 드라마 작가를 했던 분이라 그런지 소설 속 대화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읽혀서 좋았다. 범인은 항상 가까운 곳에 있다는 법칙을 벗어나지 않았는데 범인을 눈치챈 순간 화가 치밀고 짜증이 밀려왔다. 도시보다 폐쇄적인 시골에선 저런 일이 비일비재할 텐데 남자 새끼들 정말 짜증 난다. 마지막 범인 때문에 짜증 났지만 소설은 잘 읽히고 재미있었다.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도 좋을 것 같은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