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

2018. 1. 8. 13:06



새해 첫 영화는 <1987> 지금까지 봤던 한국 현대사를 다룬 영화 중에 단연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역사적 사실에만 치중하면 다큐멘터리가 되기 쉽고, 재미에 치중하면 영화 자체가 가벼워지기 쉬운데 그 사이에서 중심을 잘 잡은 영화였다. 전문가가 아니어서 잘 모르지만 영상 구도나 연출이 굉장히 세련돼서 감탄한 장면이 많았다. 특히, 故 박종철 열사의 아버님이 얼어붙은 강에 들어가 유골을 뿌리는 장면과 박 처장이 한병용 앞에서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하며 협박하는 장면, 그리고 엔딩에서 수많은 사람 위로 떠 오르는 영화의 타이틀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장면과 장면을 잇는 연출도 자연스러워서 좋았다. 슬픈 장면이 많았지만 잘 참았는데 마지막 엔딩에선 울컥했다. 저렇게 수많은 사람의 희생으로 얻은 직선제로 국민이 뽑은 첫 대통령이 노태우라는 걸 생각하니 좀 허무하기도 했다. 멀리 볼 것 없이 지난 촛불집회를 봐도 그렇고 이 나라 국민은 나라가 위기일 때 들고 일어나 바꾸고자 하는 힘은 있는데 그렇게 어렵게 얻은 것을 지키는 힘은 부족한듯하다.

배우 이야기를 해보자면 유명 배우가 지나치게 많이 나오긴 하는데 (항상 그렇듯 남자 배우들 위주로만) 다들 자기 역할을 잘 해줬다. 딱 한 명만 빼고. 도대체 왜 故 이한열 열사역에 그 배우를 캐스팅했는지 모르겠다. 등장할 때마다 혼자만 영화와 어우러지질 못하고 붕 뜨는데 그 때문에 집중이 어려웠다. 다른 건 차치하고 기본 연기가 안 되는 배우에게 왜 그런 중요한 배역을 준건지 모를 일이다. 연기 잘하는 젊은 배우가 했으면 더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들어 안타까웠다. 대조적으로 故 박종철 열사를 연기한 배우는 외모도 찰떡같이 어울리고 연기도 잘 해서 만족스러웠다. 분명 정면으로 얼굴이 나왔는데 영화가 끝날 때까지 배우가 누군지 몰랐다가 나중에 검색해보고서야 알았다. 생각보다 연기를 잘 하던데 앞으로 영화 많이 찍어줬으면 좋겠다. 그리고 박 처장 역을 맡은 배우는 등장할 때마다 존재감이 엄청나서 보는 내가 움찔할 정도였다. 디테일을 위해 몸을 키우고 마우스피스까지 끼고 연기했다는데 대사 전달력까지 좋아서 놀라웠다. 평안도 사투리도 자연스러웠고. 이 배우분은 <거북이 달린다>에서의 연기가 제일 좋았는데 이제 <1987>도 추가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