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4월 독후감

2017. 7. 9. 14:08


01. 얼음나무 숲.e - 하지은

17세기 근대 유럽, 음악의 도시로 불리는 '에단'을 무대로 한 판타지 소설이다. 드래곤과 엘프가 날아다니는 판타지가 아닌 판타지 소설은 오랜만에 읽어 본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화자는 귀족 출신 피아니스트 '고요'. 또 한 명의 주인공은 에단 최고의 천재 음악가로 불리는 바이올리니스트 '바옐'이다. 고요와 바옐은 귀족과 평민이라는 신분 차이를 뛰어넘는 친구 사이다. 바옐이 타고난 천재라면 고요는 노력하는 천재로 서로를 동경하며 질투하는 선의의 경쟁자다. 어느 날 최고의 바이올린이자 저주받은 바이올린인 '여명'을 바옐이 손에 넣게 되면서 이야기는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어떤 글에선 향기가 피어나고 어떤 글에선 맛이 느껴지기도 한다. 얼음 나무 숲에선 음악이 들린다. 초반 아름다웠던 음악 소리는 후반으로 갈수록 슬프고 처절하고 소름 돋는 소리로 변모한다. 얼음처럼 차갑지만, 불처럼 뜨거운 이야기였다.


02.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e - 백영옥
이 책의 정체는 무엇인가? 에세이? 자기계발서? 빨강머리 앤 소개서? 빨강머리 앤 원작도 아니고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명대사를 인용했다고 하는데 네??? 애니메이션이요??? 원작의 유명세 + 적당한 감성팔이 + 예쁜 디자인 + 출판사의 홍보가 합쳐진 결과물인 건데 원작을 사랑하는 독자라면 매우 실망할 책이다. 이북으로 빌려 읽어서 다행이었다.


03. 아무도 편지하지 않다.e - 장은진
주인공 '나'는 눈먼 개와 함께 발 닿는 대로 떠도는 여행자다. '나'는 여행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숫자로 번호를 붙이고 주소를 물어 매일 밤 숙소에서 그들에게 편지를 쓴다. 몇 년 동안 수백 장의 편지를 썼지만, 아직 답장은 한 장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오늘도 '나'는 여행을 하고 편지를 쓰고 잠이 든다. 주인공이 길고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간 집엔 작은 반전이 기다리고 있다. 많은 이들이 이 책을 읽고 마음이 따뜻해지고 여운이 남으며 위로를 받았다는데 나에겐 해당 사항이 없었다. 한 톨의 슬픔도 감동도 여운도 없었으니 나와는 코드 자체가 다른 책인가 보다. 사서 읽은 책인데 돈이 아까웠다.


04. 어덜트 베이비.e - 달케이크
첫사랑의 동생을 말 그대로 부모처럼 키운 서른 살의 송지영. 10살 연하남 김완규는 10년 동안 지영의 손길 아래 무럭무럭 자라 스무 살 청년이 되었다. 지영은 동생이 아닌 남자로 다가오는 완규 때문에 혼란스럽다. 이 두 사람의 관계에선 나이 차이가 아니라 가족처럼 지낸 10년 세월이 가장 큰 걸림돌로 느껴진다. 가족처럼 지낸 사람이 갑자기 이성으로 다가오는 상황이라니 으~~ 상상만 해도 소름 돋고 기분 나쁘지만, 소설에선 그저 귀엽고 당돌한 연하남과 능력 있고 사랑스러운 연상녀 커플일 뿐이다. 시간 때우기용으로 술술 읽어내려가기 좋은 소설이었다.


05. 여성 혐오가 어쨌다구? - 윤보라 외
페미니스트 서적을 사재기했던 시절에 쟁여놨던 책이다. 여섯 명의 저자가 각기 다른 시각으로 말하는 혐오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있다. 공감되는 글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어렵고 불친절한 글이 더 많았다. 가독성을 배제하고 써 내려간 논문이나 연구 보고서를 읽는 기분이라고 하면 어떤 느낌의 글인지 짐작이 갈 것이다. 그런 이유로 일반 독자가 이 책을 읽고 여성 혐오를 제대로 이해하긴 어려워 보인다. 여성 혐오라는 주제를 따로 떼어놓고 보더라도 전혀 매력 없는 책이었다.


06. 모래의 여자 - 아베 코보
곤충을 찾아 사구로 떠난 남자는 마을 남자들에게 속아 20m는 족히 넘어 보이는 모래 구덩이 속 마을에 고립된다. 남자는 과부의 집에 기거하며 매일같이 집이 모래에 파묻히지 않도록 모래를 퍼내는 작업을 한다. 모래를 팔아 돈을 버는 마을 사람들에게 이 낯선 남자의 등장은 쓸만한 일꾼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남자는 탈출을 실행에 옮기지만 마을 사람의 감시 때문에 번번이 실패로 돌아간다. 사르륵사르륵 까슬까슬 버석버석 남자는 오늘도 모래 속에 파묻혀 모래를 퍼낸다. 그 끝없이 지난한 작업은 어쩐지 우리네 인생과 닮아 보인다. 허구(虛構) 속 사구(砂丘)에서 헤매는 남자의 이야기는 황당하지만 묘하게 빠져들어 읽게 되는 매력이 있었다. 독특한 소재의 소설을 원한다면 추천한다.


07. 동급생.e - 프레드 울만
160쪽 남짓한 이 소설은 히틀러 나치 치하의 유대인이 겪은 고난을 소재로 한다. 하지만 소설이 끝나는 순간까지 그들의 고난이 직접 표현되지는 않는다. 사춘기 두 소년의 우정을 통해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스스로 혼자이길 원했던 유대인 의사의 아들 한스는 독일 귀족 소년 콘라딘이 같은 반으로 전학 오는 순간부터 그와 친구가 될 것을 예감한다. 한스의 예감처럼 두 소년은 수줍게 나눈 첫인사 이후 모든 것을 함께하는 친구가 된다. 여행을 가고 시를 읽고 서로의 수집품을 보여주는 시시콜콜한 일상을 함께하며 우정을 키워 나간다. 하지만 시대는 두 소년의 사이를 갈라놓게 되고 30년이 흐른 후 한스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방식으로 콘라딘의 소식을 듣게 된다. 소설의 마지막 한 줄, 그 한 줄을 위한 소설이었다.


08. 애프터 굿바이.e - 이다림
어쩌다 보니 또 연상녀와 연하남의 사랑 이야기다. 남편 잡아먹은 미망인 (남편이 먼저 죽었을 뿐인데 잡아먹었다느니 미망인이니 하는 표현 정말 마음에 안 든다) 으로 불리는 작가 서인희, 이제 막 인기를 얻어가고 있는 신인배우 박정호. 작가와 배우로 만난 두 사람은 정호의 일방적인 구애로 사랑을 키워간다. '어덜트 베이비'와는 달리 이쪽은 아픔도 많고 사연도 많은 커플이라 서로 이어지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지만 어쨌든 해피엔딩이다. 개인적으론 풋풋하고 유쾌한 어덜트 베이비쪽이 더 마음에 들었다. 로맨스 소설은 적립금이나 이벤트로 매우 저렴하게 사거나 무료로 받은 게 대부분인데 생각보다 분량이 많아서 선뜻 손이 가질 않는다. 한번 시작하면 술술 읽히기는 하는데 시작하기가 쉽지 않다.


09. 이와 손톱 - 빌 밸린저
1955년에 출간된 고전 서스펜스 소설로 빌 밸린저의 대표작이라고 한다. 초판 출간 당시 결말 부분을 봉한 뒤 봉한 부분을 뜯지 않고 (결말이 궁금하지 않다면) 다시 가져오면 책값을 돌려준다는 대담한 마케팅을 했던 책이기도 하다. 국내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고 내가 좋아하는 북스피어 출판사에서 '결말 봉인 특별판'을 출간해준 터라 사서 읽어봤다. 봉인된 결말이 궁금해서 열심히 읽어내려갔는데 당시에는 놀라운 트릭이었을지 몰라도 역시 지금 읽으면 좀 시시하단 생각이 든다. 작품이 문제가 아니라 세월이 지남에 따라 독자의 눈이 높아진 탓일 게다. 세대를 뛰어넘어 오랜 시간 사랑받는 고전 문학 작품들이 있다. 하지만 미스터리 장르의 고전만큼은 앞으로도 사랑하기 어려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