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이라는 단어가 책으로 태어난다면 이 책이 아닐까 싶다. 프롤로그부터 심상치 않더니 결국 책 전체에 빼곡히 포스트잇(좋은 문장 표시)이 붙었다. 특히, 한국사회에 깊숙이 뿌리내린 '병신스러운'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문화를 하나씩 짚어줄 때는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그 병신스러운 문화에는 조직, 서열, 체면, 겉치레 등이 있는데 어느 것 하나 효율적이고 생산적인 것이 없다는 게 공통점이다. 그만큼 우리 사회 전체가 비효율적으로 굴러가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 사람들아! 개인주의는 이기주의가 아님을 기억하자. 엄연히 다른 개념을 헛갈려 지레짐작하고 개인주의자는 이기적이라고 결론 내리지 않았으면 한다. 뜻을 모르면 제발 찾아보기라도 하자. 요즘은 무지도 죄가 되는 세상이다. 개인주의자들은 궁긍적으로 '합리적인 개인주의자가 모여서 만드는 건강한 사회'를 꿈꾸지만, 한국에선 실현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내가 이 나라에서 사라지는 게 더 빠르고 속 편한 길인 것만 같다.

언제부턴가 이 나라는 멀쩡한 사람이 오히려 진상들의 눈치를 보고 살아야 하는 곳이 되었다. 분명, 좋은 사람도 있지만, 진상 한 명이 일당백의 효과를 발휘하고 있어 그들의 존재는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 예전엔 말 그대로 똥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더러워서 피했는데 요즘엔 더러움과 함께 무서움까지 장착한 똥이 많아서 피하지 않고 상대했다간 나만 험한 꼴을 당할 수도 있다. 나만 아니면 된다는 이기주의와 돈이면 다 된다는 천박함으로 똘똘 뭉친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건 피곤한 일이다. 이 나라 사람들이 이렇게 이기적이고 천박해진 데에는 애초에 여유라는 것이 싹틀 수 없도록 만들어진 사회 구조의 문제가 가장 크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어쩌면 인과관계가 그 반대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든다.

제목만 봐선 어려운 교양서 같아서 좀 겁을 먹게 되는데 교양서라기보단 수필에 더 가깝고 짧게 쓴 글이 묶인 책이어서 한 챕터씩 쉬어가며 읽기에도 좋다. 저자의 직업이 판사인만큼 법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지만 문장이 쉽고 간결해서 잘 읽힌다. 타고나길 개인주의 성향이 강하고 한국에서 흔히 '정'이라고 포장되는 '오지랖' 문화를 혐오하는 사람에겐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잠시 잠깐이나마 속이 시원해지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반대로 개인주의자에 대해 도저히 이해를 못 하겠다 싶은 사람에게도 추천하고 싶다. 그들에겐 개인주의자에 대해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내 생각일 뿐 다른 별에서 온 사람들에게 강요할 수 있는 것이 못 된다. 그저 저 별에서 저런 과정을 거쳐 자란 인간들은 저렇게 생각하는구나 하는 것을 서로 알게 될 뿐이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그 차이에 대한 인식이 평화로운 공존과 타협의 시작일지 모른다. (중략) '다름'은 물론 불편하다. 하지만 그 불편함을 가능한 한 참아주는 것, 그것이 톨레랑스다. 차이에 대한 용인이다. 우리 평범한 인간들이 어찌 이웃을 '사랑'하기까지 하겠는가. 그저 큰 피해 없으면 참아주기라도 하자는 것이다. - P.10

"네 능력은 뛰어난 것에 있는 게 아니다. 쉬지 않고 가는 데 있어"라고 격려해주면서도, 끝에는 "그러니 얼마나 힘이 들겠어"라며 알아주는 마음. 우리 서로에게 이것이 필요한 시대가 아닐까. - P.14

개인의 행복을 위한 도구인 집단이 거꾸로 개인의 행복의 잣대가 되어버리는 순간, 집단이라는 리바이어던은 바다괴물로 돌아가 개인을 삼킨다. 집단 내에서의 서열, 타인과의 비교가 행복의 기준인 사회에서는 개인은 분수를 지킬 줄 아는 노예가 되어야 비로소 행복할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사다리 위로 한칸이라도 더 올라가려고 아등바등 매달려 있다가 때가 되면 무덤으로 떨어질 뿐이다. 행복의 주어가 잘못 쓰여 있는 사회의 비극이다. - P.22

개인주의는 근대 계몽주의, 합리주의와 함께 발전하며 서구사회의 근간을 형성했다. 합리적 개인주의자는 인간은 필연적으로 사회를 이루어 살 수밖에 없고, 그것이 개인의 행복 추구에 필수적임을 이해한다. 그렇기에 사회에는 공정한 규칙이 필요하고, 자신의 자유가 일정 부분 제약될 수 있음을 수긍하고, 더 나아가 다른 입장의 사람들과 타협할 줄 알며, 개인의 힘만으로는 바꿀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타인들과 연대한다. 개인주의, 합리주의, 사회의식이 균형을 이룬 사회가 바로 합리적 개인주의자들의 사회다. - P.26

어차피 정답을 가진이는 아무도 없다. 우리 사회는 아직도 어사 박문수나 판관 포청천처럼 누군가 강력한 직권 발동으로 사회정의를 실현하고 악인을 엄벌하는 것을 바란다. 정의롭고 인간적이고 혜안 있는 영웅적 정치인이 홀연히 백마 타고 나타나서 악인들을 때려잡고 행복한 사회를 만들어주길 바란다. 아무리 기다려도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링에 올라야 할 선수는 바로 당신, 개인이다. - P.27

타인과의 비교에 대한 집착이 무한경쟁을 낳는다. 잘나가는 집단의 일원이 되어야 비로소 안도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탈락의 공포에 시달린다. 결국 자존감 결핍으로 인한 집단 의존증은 집단의 뒤에 숨은 무책임한 이기주의와 쉽게 결합한다. 한 개인으로는 위축되어 있으면서도 익명의 가면을 쓰면 뻔뻔스러워지고 무리를 지으면 잔혹해진다. 고도성장기의 신화가 끝난 저성장시대, 강자와 약자의 격차는 넘을 수 없게 크고, 약자는 위를 넘볼 수 없으니 어떻게든 무리를 지어 더 약한 자와 구분하려든다. 가진 것은 이 나라 국적뿐인 이들이 이주민들을 멸시하고, 성기 하나가 마지막 자존심인 남성들이 여성을 증오한다. - P.37

만국의 개인주의자들이여, 싫은 건 싫다고 말하라. 그대들이 잃을 것은 무난한 사람이라는 평판이지만, 얻을 것은 자유와 행복이다. 똥개가 짖어대도 기차는 간다. - P.57~58

소소한 행복을 찾으며 현실에 만족하는 젊은이들이 늘어나는 현상은 세대론보다 모든 생물의 특징인 '적응'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맞지 않을까. 결국 변한 건 세대라기보다 시대다. 인간은 누구나 주어진 여건하에서 행복을 추구한다. 저성장시대에 맞는 생존 전략, 행복 전략을 본능적으로 찾게 되는 것이고, 인간이 행복하고자 하는 것은 타인의 행복을 침해하지 않는 이상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소소하지만 다양한 행복을 추구하며 타인과의 비교에 집착하지 않는 것은 분명히 현명한 방법이다. 문제는 그것이 지속가능한가다. - P.118

법관들도 말에 대해 주의하고 반성하기 위해 전문가의 강의를 듣는다. 그때 배운 것이 있다. 데이의 「세 황금문」이다. 누구나 말하기 전에 세 문을 거쳐야 한다. '그것이 참말인가?' '그것이 필요한 말인가?' '그것이 친절한 말인가?' 흔히들 첫번째 질문만 생각한다. 살집이 좀 있는 사람에게 '뚱뚱하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이 아니다. 그러나 참말이기는 하지만 굳이 입 밖에 낼 필요는 없는 말이다. 사실 필요한 말이 아니면 하지 말라는 두번째 문만 잘 지켜도 대부분의 잘못은 막을 수 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필요 없는 말로 남에게 상처를 주며 살아가고 있는지 - P.136

협소한 상식에만 갇혀 있는 인간은 비상식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기에 인간과 세상을 깊이 이해하는 데 실패하기 십상이다. 아무리 첨단 과학이 발달해도 여전히 더 많은 문학이 필요한 이유다. - P.156

악을 행하는 악마보다 선악 구분조차 없는 백지 상태의 야수가 더 무섭다. 자기 행동의 의미를 성찰할 줄 모르는 무지야말로 가장 위험한 야수인 것이다. 그리고 이 야수를 문명의 굴레에서 풀어준 것은 무소불위의 정치권력이다. - P.235

북유럽 전역에서 관습법처럼 통용되는 '얀테의 법'이라는 것도 있다. 1933년 산데모제라는 노르웨이 작가가 이를 정리하여 소설 속 가상의 덴마크 마을 얀테의 관습법으로 발표했다고 하는데, 그 내용의 핵심은 '당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남보다 더 낫다고 남보다 더 많이 안다고 남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남을 비웃지 마라'다. - P.260

한 사회의 성숙함은 위기 속에서 비로소 분명히 모습을 드러낸다. - P.2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