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의 불 - C.J. 샌섬

2016. 9. 24. 20:43



어둠의 불은 헨리 8세가 넷째 부인에서 다섯째 부인으로 갈아타고자 하는 딱 그때, 크롬웰의 기반이 매우 불안했던 그 시절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넷째 부인 앤의 초상화를 보고 마음에 들어서 결혼을 결정했던 헨리 8세는 초상화와는 다른 앤의 실물을 보고 매우 실망하게 된다. 21세기에 포토샵이 있다면 16세기엔 초상화가 있었던 모양이다. 헨리 8세는 결국 '잠자리를 가지지 않았으니 이 결혼 무효다'라는 찌질스러운 주장을 펼치며 앤과의 결혼을 없던 일로 하고 자신에게 앤을 소개한 오른팔 크롬웰까지 참수시키고 만다. 그렇게 다섯 번째 결혼에 골인하지만 네, 이번 부인은 외도를 했고요. 열 받아서 부인도 참수시켰고요. 여섯 번째 부인까지 얻었다는데 여성편력 한번 징글징글한 왕이 아닐 수 없다.

전편 <수도원의 죽음>은 굉장히 정적이었는데 이 책은 꽤 동적이다. 역동적이라고 하기엔 조금 부족하니까 동적이라고 하겠다. 함께 다니는 파트너의 성격이 전편과 크게 달라졌는데 그 영향도 커 보인다. 처음엔 샤들레이크가 이 새로운 파트너 바라크를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데 나도 덩달아서 의심했다가 나중엔 좋은 사람인 걸 알고 안심했다. 몸이 불편한 샤들레이크에게 바라크처럼 행동력 있는 파트너가 생겨서 다행이란 생각도 들었다. 우리의 주인공 샤들레이크는 전편에선 신체 장애에 대한 콤플렉스에 시달리며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모습이 많이 보였는데 이번 이야기에선 한층 더 성숙하고 용감한 모습을 보여준다. 캐릭터나 이야기 짜임새도 전편보다 훨씬 정돈되고 탄탄해진 느낌이 들었다.
 
제목으로 쓰인 어둠의 불의 정체는 책을 읽다 보면 누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현대인들에게 부와 편리함을 가져다준 것이 옛날 사람들에겐 두려움의 대상이었다니 귀엽기까지 하다. 새로운 파트너 바라크와 함께 어둠의 불을 찾아 고군분투하는 샤들레이크. 크롬웰이 죽고 난 뒤의 이야기도 궁금한데 다음 편은 국내에 출간이 안 돼서 아쉽다. 검색해보니 매튜 샤들레이크 시리즈가 총 여섯 편이던데 뒤에 네 편도 출간해주면 좋겠다.

요즘 추리소설처럼 기발한 트릭도 없고 스릴이 넘치는 것도 아니지만, 역사추리소설로서는 굉장히 매력 넘치는 소설이다. 추리소설은 재밌고 지루하지 않아야 한다는 사람에겐 별로겠지만 역사를 좋아하고 잘 짜인 이야기를 좋아한다면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나는 우리나라 조선 시대 이야기만큼이나 유럽 왕실 이야기도 좋아하는지라 재밌게 읽었다. 그리고 이 작가의 책은 글씨도 작고 페이지도 많고 엄청 재밌지도 않은데 이상하게 잘 읽혀서 좀 신기했다.


"그런데 그 '뛰어난 재능이 발휘된 결과'가 무슨 문제가 되냐 그건가, 매튜? 사람이 사물을 볼 때는 누구나 조금씩은 빛의 조건에 따라 보는 시각이 달라지는 법이지. 정확하게 고정된 시각으로 사물을 볼 수는 없는 걸세. 나는 홀바인에게 최상의 빛의 조건에서 앤 공녀를 그리도록 주문했는데, 그는 그 조건을 충실히 지켰지. 그런데 그게 실수였던 거야. 무슨 말인지 자네는 알겠나?" - P.113

"인간이란 본래 폭력적이고 잔인한 존재라네. 신앙은 종종 전쟁을 일으키기도 하지. 그럴 때의 신앙은 진정한 것이라고 할 수 없지. 하느님의 이름을 빌려 자신들의 입장을 정당화시키는 것일 뿐, 오히려 인간이 하느님을 침묵케하는 행위일세." - P.606

"우리는 다른 사람의 희생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 인간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죄를 범하곤 해. 나 역시 스켈리한테 그런 희생을 강요했고, 심지어 엘리자베스 가족들은 그녀에게 살인죄를 뒤집어씌우기까지 해서 희생의 제물로 삼으려고 했지. 개혁가들은 교황파들을 희생양으로 만들었는데, 이제는 거꾸로 개혁가들이 제물이 되는 신세가 되었네. 과연 이런 악순환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 P.6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