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 - 이승우

2016. 2. 15. 21:48



독자는 인간 내면의 독과 사회 전반에 깔린 독이 만났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이 소설의 주인공 임순관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저자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마음속에 악마가 있고, 그 악마를 키우고 손과 발을 주는 것은 이 세상의 공기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었다고 한다. 독이 퍼진 세상의 공기를 마시는 일은 곧 독을 마시는 행위이자 독을 내뿜는 행위이기도 하다. 현실에서 소설 속 손철희나 임순관처럼 쥐새끼를 죽이고 자신도 죽는 극단적 선택을 하는 인간은 드물다. 인간 대부분은 쥐새끼들과 함께 사이좋게 독을 마시고 사이좋게 독을 내뿜으며 평생을 살아가야 한다. 평생 쥐새끼들과 함께하는 삶이라니. 이쯤 되면 살아 있는 쪽이 오히려 패자라는 생각이 든다.

오래전 도덕 시간, 맹자는 성선설을 순자는 성악설을 고자(告子)는 성무선악설을 주장했다고 배웠다. 이 중 누구의 주장이 옳은가? 라고 묻는다면 누구도 옳지 않지만, 누구도 그르지 않다고 답할 수밖에 없다. 인간 개개인의 기본적인 선, 악의 성향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고, 자라나면서 받는 외부의 영향이 증폭제 역할을 한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어떤 씨앗이 어떤 환경을 만나느냐에 따라 그 열매가 달라지는 것이다. 물론, 사이코패스처럼 어떤 환경에도 큰 영향을 받지 않는 슈퍼 씨앗도 있을 것이다. 씨앗이 어찌 됐든, 환경이 어찌 됐든 인간이 가장 악하다는 사실은 변함없다.

이승우 작가는 예지력이라도 있는 걸까. 도저히 20년 전에 쓰인 소설이라곤 믿기 어려울 정도로 지금 우리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소설이었다. 전에 읽었던 <지상의 노래>에 비하면 내용도 쉽고, 문장도 더 잘 읽힌다. 하지만 가볍진 않다. 때문에 사유할 요소가 많다. 그래서 좋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글을 쓰는 작가가 있다니 존경스럽다.


나쁜 구석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열 개가 나빠도 나쁘고, 하나가 나빠도 나쁘다. 그러나 열 개가 나쁜 것과 하나가 나쁜 것이 같다고 할 수는 없다. 요는 그 나쁨이 얼마나 나쁘냐, 누구에 대해서 나쁘냐일 뿐이다. 이 사람을 이롭게 하기 위해 저 사람을 해롭게 해야 하는 것이 인생사다. 이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기 위해 저 사람에게 나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 사람이 사는 세상이다. 불변하는 것, 정해진 것, 고정된 것은 없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고 가변적이다. - P.18~19

내 몸 안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 것일까. 무엇이 들어 있어서 저렇게 고약한 악취를 풍겨내게 하는 것일까. 어쩌면 그것들은 내 안에 생긴 커다란 종양에서 터져 나온 고름인지 모른다. 아니, 내 몸의 내부가 아예 커다란 종양 덩어리인지 모른다. 유출되는 것은 그곳에 그것이 있기 때문에 빠져나온다. 내 안에 썩은 무엇인가가 들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아예 내 안이 모조리 썩어 있는 것 같은 불쾌감……. 그 순간에 한 경전의 주인공이 했다는 말이 떠오른다.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한다. 안에서 밖으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 안에서 나오는 모든 것이 다 더럽다. 왜냐하면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다 더럽기 때문이다. - P.83~84

맹인이 본 것이 맹인에게 진실인 것처럼, 색맹이 본 것 또한 색맹에게는 진실이다. 개개인이 이 세계에 대해 느끼고 수용하고 응답하는 양식의 주관적인 요소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들 때문에 세상이 종종 시끄러워지고 헝클어진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이 세계 내의 본질, 또는 이 세계로부터 읽어낼 수 있는 진실이 하나밖에 없다는 주장이야말로 전체주의적인 발상의 소산이다. 자기네들이 진리를 사유(私有)하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행세하는 그런 종류의 위인들은 다른 쪽의 입장을 이해하려는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너무 당연하고 너무 쉽게 파시스트가 된다. - P.202

내 안에 있는 것은, 내가 아니면서도, 실은 내 밖에 있는 어떤 것보다 더욱 나이다. 내 안에 있기 때문에 더욱 나이다. 이제부터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있는 그가 사는 것이다. 이제부터 내가 행동하는 것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있는 그가 하는 것이다. 그는 내가 아니지만, 내 안에 있기 때문에 더욱 나이다. - P.296~297

마지막까지 임순관이 자신과 동일시하기를 원했던 손철희는 말했다. 그는 세상을 향해 말한 것이다. "나의 행위에 공감하는 모든 사람들이 나의 공범이다. 나는 죽일 만한 사람을 죽였다. 그 점은 당신들도 동의하지 않는가? 사람들은 그들이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나는 그들의 생각을 실천했다. 그들의 생각이 없다면 나의 행동도 없었을 것이다." - P.3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