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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2. 26. 21:32

한 권의 책과 그것을 읽은 경험은 독자 개인에게만 고유한 어떤 경험으로 남습니다. 그렇다면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독서를 왜 할까요? 그것은, 누구와도 나눌 수 없다는 바로 그 점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거의 모든 것이 공개돼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 하루하루는 시작부터 끝까지 공유되고 공개됩니다. 웹과 인터넷, 거리의 CCTV, 우리가 소비한 흔적 하나하나가 다 축적되어 빅데이터로 남습니다. 직장은 우리의 영혼까지 요구합니다. 모든 것이 '털리는' 시대. 그러나 책으로 얻은 것들은 누구도 가져갈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독서는 다른 사람들과 뭔가를 공유하기 위한 게 아니라 오히려 다른 사람들과 결코 공유할 수 없는 자기만의 세계, 내면을 구축하기 위한 것입니다.

백 명의 독자가 있다면 백 개의 다른 세계가 존재하고 그 백 개의 세계는 서로 완전히 다릅니다. 읽은 책이 다르고, 설령 같은 책을 읽었더라도 그것에 대한 기억과 감성이 다릅니다. 자기 것이 점점 사라져가는 현대에 독서가 중요한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나, 고유한 나, 누구에게도 털리지 않는 내면을 가진 나를 만들고 지키는 것으로서의 독서. 그렇게 단단하고 고유한 내면을 가진 존재들, 자기 세계를 가진 이들이 타인을 존중하면서 살아가는 세계가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세계의 모습입니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면 조용히 자기 집으로 돌아가 소박하고 맛있는 저녁식사를 마친 후, 자기 침대에 누워 어제 읽던 책을 이어서 읽는 삶. 자기 서재와 마음속에서만큼은 아무도 못 말리는 정신적 바람둥이로 살아가는 사람들. 이런 세상이 제가 꿈꾸는 이상적인 사회입니다. 쉽지는 않겠지만 꿈은 꿀 수 있겠죠. 그리고 그 꿈 역시 아무도 빼앗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첫사랑에 대한 기억을 앗아갈 수 없듯이 말입니다.

김영하 <말하다> P.180~181


나는 신념에 가득 찬 자들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습니다. 나는 오히려 의심에 가득 차 자들을 신뢰합니다. 내가 신념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니로되, 인간의 진실이 과연 신념 쪽에 있느냐 의심 쪽에 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더 많은 진실은 의심 쪽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물론 저와 반대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더군요. 아주 많더군요. 우리는 의견과 사실을 구별해서 말하는 능력을 이미 상실한 것이죠. 상실한 지가 오래됐어요. 한참 됐어요. 사회의 언어 자체가 소통불가능하게 되어버렸을 때, 우리는 민주주의를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의견과 사실을 구분해서 말한다는 것은, 민주주의 사회를 만드는 기초이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는 소통에 의해서만 가능할 터인데, 소통되지 않는 언어로 무슨 민주정치를 하겠습니까.


김훈 <바다의 기별> P.135~136


종종 공감을 넘어 위로가 되어주는 글을 만날 때가 있다. 최근에 읽은 김영하 에세이 <말하다>가 그런 책이다. 밥 먹을 시간도 부족할 정도로 일에 치이는 일상에 그나마 위로가 되는 시간은 책 읽는 시간이다. 김영하 작가는 소설도 좋지만 에세이도 그에 못지않게 좋다. 그는 단단하지만 유연한 사고를 가진 어른이란 생각이 든다. 겉모습만 어른인 수많은 가짜 말고 진짜 어른 말이다. 김훈 작가는 글 잘 쓰는 마초 이미지가 강한데 에세이 글이 예상보다 좋았다. 소설을 읽을 땐 항상 답답함에 몸부림쳤었는데 그의 글에 공감하는 날이 오다니 신기한 일이다. 다른 에세이도 읽어 보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