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서의 문제 - 도진기

2015. 6. 9. 21:38



어둠의 변호사 '고진' 시리즈에 이은 '진구' 시리즈 첫 번째 소설이다. 새로운 시리즈의 주인공 진구는 대학을 중퇴하고 고시원에서 생활하면서 대리운전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그에겐 무엇을 하고자 하는 의지도 없고 그럴싸한 꿈도 없지만, 남들과는 다른 쪽으로 비상하게 돌아가는 머리가 있다. 자신의 흥미를 자극하는 사건에만 움직이는 기분파이며 법망의 허점을 교묘히 이용하여 이익을 챙기는데 주저함이 없다. 자신이 당한 만큼 돌려줘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기도 하다. 누가 뭐라든 나는 나만의 길을 간다 = 마이웨이에 딱 들어맞는 인간이다.


일곱 편의 단편을 하나하나 읽다 보면 진구라는 캐릭터가 머릿속에서 하나씩 완성된다. 특히, 네 번째 단편 '티켓다방의 죽음'에서 진구의 성격이 더욱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가 해결하는 사건은 대부분 사소하지만 까다로운 경우가 많다. 여자친구 해미가 사건 대부분을 연결해주는 다리 역할을 하고 있어서 더 그런듯하다. 다른 탐정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을 시시해 보이는 사건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결국엔 사건도 해결하고 부수입도 쏠쏠히 챙기는 틈새 탐정 진구. '어둠의 변호사' 고진과는 닮은 듯 다르다.

아직 시리즈 2, 3을 안 읽어봐서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소설의 마지막 부분을 봐선 고진과도 부딪히는 사건이 있는 것 같던데 둘의 만남은 어떤 모습일지, 서로를 어떤 식으로 바라볼지 궁금해진다. 전체적으로 감탄할만한 사건이나 트릭은 없지만 무난하게 잘 읽히는 편이고 아무래도 새로운 시리즈에 새로운 캐릭터가 등장하다 보니 사건 자체보다는 캐릭터를 소개한다는 느낌이 조금 더 강한 소설이었다.

도진기 작가의 소설 속에는 항상 미모의 '여성' 캐릭터가 등장하는데 그 느낌이 뭐랄까 주인공 남자를 보조하고 돋보이게 해주는 '장식'같은 느낌이 든다. 혼자만의 착각일 수도 있지만 글을 읽을 때마다 은근히 거슬리는 부분이다.


"그래도 재능 있는 사람은 결국은 눈에 띌 거야." 해미는 마치 눈앞에 은비를 두고 위로하듯 말했다. "글쎄, 출발선이 엇비슷하던 옛날 얘기 아닐까. 어쨌든 뭐, 오즈에 간 도로시에게처럼 노란 벽돌 길을 깔아주진 못해도, 적어도 재능을 다치게 하지는 말아야겠지. 콘크리트를 뚫고서 풀포기가 자라기도 하지만, 차바퀴가 콱 밟아버리면 그것도 끝이니까." 진구의 말은 끝으로 갈수록 어쩐지 자조적인 대사처럼 들렸다. - P.312~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