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이름만으로 설명이 가능한 움베르토 에코. 에코 할배의 책은 <장미의 이름>과 동화책 <지구인 화성인 우주인> 두 권만 끝까지 읽었는데 마치 열댓 권은 읽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도돌이표처럼 앞부분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는 책 때문인지 할배의 유명세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읽은 글의 분량에 비해 익숙하고 친숙한 작가다. 대학 때 읽은 <장미의 이름>은 재도전 끝에 완독에 성공했었고 <전날의 섬>은 아직도 앞부분 50페이지를 넘기질 못하고 있다. 이 책을 다 읽은 독자들이 분명 있을 텐데 진정으로 존경스럽다. 할배의 책을 막힘없이 술술 읽으려면 어느 정도의 수준이 되어야 하는지 나로선 까마득하다.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에선 에코 할배의 '해박한 지식으로 우아하고 유쾌하게 세상 비틀어 보기'를 경험할 수 있다. 제1부 실용처세법을 읽다 보면 세계 100대 지식인에 뽑히는 유명인도 결국엔 나와 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더없이 친근하게 느껴진다. 혼자 낄낄거리며 웃었던 문장들이 많은데 그중에서도 특히 기억에 남는 글은 71페이지부터 95페이지까지 연달아 이어져 있는 세 가지 이야기 '도둑맞은 운전 면허증을 재발급받는 방법', '사용 설명서를 따르는 방법', '진실을, 오로지 진실을 말하는 방법'이다.

때는 1981년 5월 에코 할배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지갑을 잃어버린다. 카드 분실 신고와 재발급은 일사천리로 처리됐으나 문제는 운전 면허증 재발급이었다. 이탈리아에서 운전면허증을 재발급받기 위해선 기존 운전면허증 번호를 알아야 하는데 어디에도 면허증 번호를 적어 놓지 않은 것이다. 이미 잃어버린 운전면허증 번호를 알아내는 데만도 여러 지인의 도움을 받아야 했고 이후 임시 면허증을 받는 일도 험난했다. 5월에 시작된 운전면허증 재발급은 그해 12월이 되어서도 처리되지 않았다고 하니 이탈리아는 한국과는 반대의 의미로 대단한 나라임엔 틀림없다. 더 놀라운 사실은 에코 할배처럼 지인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그나마 일 처리가 빨라질 수 있지만, 일반인 중에선 2, 3년이 지나도 면허증 재발급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고 한다. 이탈리아 강적이다. 예전에 하루키 <먼북소리>를 읽을 때도 그랬고 이탈리아 이야기는 쓰는 사람은 괴로울지 몰라도 읽는 사람은 굉장히 즐겁다.

1, 2부에선 여러 부분에 공감하고 감탄하면서 읽다가 3부와 4부에 와선 아, 역시 움베르토 에코구나. 호락호락하지 않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움베르토 에코 책 중에선 쉬운 편에 속하고 소리 내 웃을 수 있는 글이 많아서 재밌었던 책이다. 어렵고 머리 아프지만 지적 호기심과 정복욕을 자극하는 움베르토 에코, 매력적인 할배다. 오래오래 사세요.


예컨대, 당신이 사용하고 있는 프로그램에 <개체 삽입> 기능이 있다는 것을 해당 메뉴를 보고 알았다고 하자. 당신은 개체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적절한 곳에 삽입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궁금하게 여길 것이다. 그러나 걱정할 게 없다. 도움말을 작동시키면 다음과 같은 대답이 나타난다. <문서에 개체를 삽입하는 기능입니다.> 어쩌면 당신은 도움말 작성자가 모든 진실을 다 말하지 않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만일 당신이 그런 의혹을 품는다면 나는 이렇게 그 도움말 작성자를 역성들 것이다. 그는 진실을 말했다. 그 기능은 정말로 설명된 바를 행한다라고. 다만 문제는 당신이 받은 그 대답이 당신의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라, 대략적으로 보아 당신의 질문에서 물음표만 제거한 꼴이라는 점에 있다. - P.94~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