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겐 콜린 퍼스 주연의 영화로 더 잘 알려진 <싱글맨>의 원작 소설이다. 1964년에 출간된 이 소설은 주인공이 당당히 동성애자임을 밝히는 최초의 소설 중 하나였다고 한다. 사고로 연인을 잃은 남자의 하루를 작가의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풀어내고 있다.

조지의 연인 짐은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연인과 함께 살던 집에 홀로 남겨진 조지는 육신은 살아있지만, 영혼은 상실감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말 잘 듣는 몸은 매일 아침 기계적으로 눈을 뜨고 씻고 옷을 입고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조지'로서의 삶을 시작한다. 조지라는 가면을 쓴 채 대학에서 강의하고, 동료들과 식사를 하고, 죽은 애인의 여자친구였으며 이젠 병실에서 죽을 날만을 기다리는 여자의 병문안을 가고, 헬스클럽에 들러 운동을 하며 잠시나마 편안함을 느낀다. 이어진 샬럿과의 만남에서 취하고 자주 가는 술집에 들렀다 자신의 강의를 듣는 제자 케니를 마주하게 된다. 과거에 얽매여 있던 그의 하루에 잠시나마 현재가 끼어드는 순간이었다. 동성애자라던가, 과거에 바람난 연인을 사고로 잃었다던가 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우리는 매일 같이 오늘을, 현재를 살아야 한다. 그것은 지루하고 외로운 일일 것이나 그 안에 사랑이 있다면 버틸만한 일인지도 모른다.

40여 년 전 소설이지만 동성애자를 바라보는 이성애자들의 시선은 지금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노골적으로 혐오감을 드러내는 사람, 속으론 혐오하지만 아닌 척 친절을 베푸는 사람, 동물원 원숭이 보듯 호기심으로 다가와 상처를 주는 사람 등등 다양하다. 솔직히 다른 사람이 동성을 사랑하든 외계인을 사랑하든 무슨 상관인가 싶다. 사람들의 생김새나 목소리, 호불호가 전부 다르듯 동성애자도 취향이 다른 사람일 뿐이다. 그것은 그들의 선택도 병도 아니며 그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다. 이해되지 않는데 애써 그들을 이해하려들 필요는 없다. 우리는 어차피 타인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다만 다름을 틀림으로 인식하고 다수의 편에 숨어 소수에게 손가락질하는 비겁한 짓만 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동성애자가 주인공이지만 퀴어 소설이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저 늙고 외롭고 상처로 가득한 평범한 인간이 있을 뿐이다. 나의 하루를 글로 써내려간다면 이 소설보다 훨씬 더 재미없고 지루 할거란 생각이 들었다. 사는 것은 어쩌면 그 지루함과 외로움을 이겨내는 훈련일지도 모르겠다.


조지가 영국으로 돌아갈까? 아니, 여기서 계속 살리라. 짐 때문에? 아니, 짐은 이제 과거다. 조지에게는 아무 소용 없다. 조지 스스로가 기억하려 애쓰고 있을 뿐이다. 잊기가 두렵기 때문이다. 짐은 내 삶이야. 그러나 조지가 계속 살아고자 한다면, 조지는 잊어야 한다. 짐은 죽었다. 그렇다면 조지는 왜 여기서 계속 살까? 여기가 짐을 만난 곳이니까. 여기서 새로운 짐을 찾게 되리라고 믿고 있으니까. 조지 자신은 모르고 있지만, 조지는 이미 찾기 시작했다. 조지가 자신은 새로운 짐을 찾을 수 있다고 믿고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찾아야 한다는 것만 알 뿐이다. 꼭 찾아야 하니까 찾을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조지는 점점 늙는다. 조만간 너무 늦은 때가 찾아오지 않을까? 조지에게 그런 말을 절대 쓰지 마라. 조지는 듣지도 않을 테니. 들으려 하지도 않을 테니. 빌어먹을 미래. 미래는 케니를 비롯한 젊은 애들이나 가지라고 해. 샬럿은 과거나 가지라고 해. 조지는 현재만 끌어안는다. 현재에 조지는 새로운 짐을 찾아야 한다. 현재에 조지는 사랑을 해야 한다. 현재에 조지는 살아야 한다……. -  P.193~1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