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백 - 장강명

2014. 12. 25. 15:37



모든 틀이 이미 다 짜여져 있는 세상, 그 구조 속에서 옴싹달싹도 할 수 없게 된 오늘날의 젊은 세대를 작가는 '표백 세대'라고 칭한다. 기성세대가 100의 노력으로 70을 얻었다면 표백 세대는 노력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얻는 것조차 어렵다. 고학벌, 고스펙 젊은이들이 사회에 발을 들이는 순간 기업들은 그들의 능력을 도전 정신 운운하며 저렴한 가격으로 또는 공짜로 착취하려 든다. 기성세대들이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 내지는 '아프니까 청춘이다.' 같은 소리를 할 때마다 그렇게 좋은 거 당신들이나 많이 하라고 말해 주고 싶다. 고생은 안 하는 게 제일이고, 아프면 환자일 뿐이다.

소설은 방황 끝에 공무원이된 주인공 시점으로 전개되고 세연이 남긴 잡기 모음 글이 중간중간 등장한다. 세연의 잡기는 초반엔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고 나중엔 궁금증을 해결해주는 역할을 한다. 세연이 저항의 방법으로 선택한 '자살'은 잠시 잠깐의 관심을 얻었을 뿐 결론적으론 무의미했다고 생각한다. 뭐 하나 부족한 것 없는 그들의 자살은 내 눈엔 철없는 객기로 비쳤다. 가장 좋은 순간에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더 큰 충격과 의미를 남길 수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과연 그랬을까?

자살이라는 저항 수단엔 반감이 들었지만 나와 같은 세대의 이야기였기에 공감할 수 있는 부분도 컸다. 슬프고 아프고 화나고 결국엔 허무해졌다. 부디 시대와 사회 구조의 잘못을 개개인의 능력과 노력의 부족으로 몰아가는 짓만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꼭 칼을 들고 찔러야지만 상처가 나는 것은 아님을 명심하자.


표백 세대는 정신적인 면에서 산업화 시대의 노동자들보다도 더 한심한 처지에 있다. 산업화 시대의 노동자들은 사회주의 사회라는 ‘다음 단계’를 꿈꾸며,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주체로서 뚜렷한 이념과 이상을 갖고 정치권력을 장악하려는 시도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표백 세대는 지배 이념에 맞서 그들을 묶어주거나 그들의 익을 대변할 이념이 없으며, 그렇기에 원자화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낙원’에서 태어난 이들에게 이상향은 있을 수 없기에, 표백 세대는 혁명과 변혁에 관한 한 아무런 희망을 품을 수 없다. 이들은 사회를 비난할 권리조차 박탈당한다. 완성한 사회에서 표백 세대의 실패는 그들 개개인의 무능력 탓으로 귀결된다. - P.1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