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의 노래 - 이승우

2014. 7. 24. 21:46



여행작가 강영호의 유고를 완성하고자 동생 강상호는 출판사 직원과 함께 원고에 쓰인 마지막 장소, 천산 수도원 '헤브론 성'을 찾는다. 일행은 흔적만 남은 수도원을 둘러보던 중 지하에서 한 사람이 겨우 몸을 눕힐만한 작은 공간을 발견하게 된다. 일흔 개가 넘는 작은 공간에 아름답게 장식된 글씨체로 쓰인 성경 구절은 놀라움과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천산 수도원 벽서에 대한 내용이 실린 강영호의 유작이 출간되고, 우연히 그 책을 보게 된 교회사 강사 차동연은 한눈에 벽서의 가치를 알아보고 벽서 연구를 하기 위해 천산 수도원으로 향한다.

후는 사촌 누이 연희를 좋아한다. 어린 후는 박 중위 때문에 연희 누나가 상처받고 마을을 떠난 것에 분노하여 박 중위가 전역하기 전날 그에게 찾아가 충동적으로 칼을 휘두른다. 평소답지 않은 아들의 행동에 불안감을 느낀 아버지는 박 중위를 찌르고 공포와 혼란에 빠진 후와 마주친다. 아버지는 후를 보호하고자 비 내리는 산을 넘어 천산 수도원 헤브론 성에 후를 맡긴다. 속세에서의 모든 것을 버리고 서로를 '형제'라고 부르는 헤브론 성 안에서 후는 차츰 안정을 되찾는다.

소설의 시작은 이러하다. 시작만 놓고 보면 무엇에 관한 소설인지 갈피를 잡기 어렵다. 종교적 색채도 보이고 약간은 추리 소설 같기도 하다. 후가 속죄처럼 토해내는 이야기와 요양원에서 만난 장의 이야기를 읽고 나서야 어느 정도 감이 잡힌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어떠한 '욕망'과 어떠한 '죄의식'에 시달린다. 사촌 누이 연희를 향한 자신의 마음에 순수하지 못한 욕망이 있었음을 깨닫고 줄곧 죄의식에 시달리는 후, 평생 홀로 가슴속에 품고 살아야 했던 묵직한 덩어리를 생의 마지막 즈음 내려놓는 장, 장군의 그림자로 살았으나 그림자가 아니길 거부한 순간 장군의 말대로 못쓰게 되어버린 한정효까지 각기 다른 욕망이 빚어낸 죄의식은 내내 그들을 괴롭히고 그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속죄의 길을 찾는다.

곳곳에서 튀어나오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문장들을 생각 없이 읽다가 다시 되짚어 읽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어쩐지 다 읽었지만 다 읽은 것 같지 않은 소설이다. 행간의 의미는 말할 것도 없고 표면적인 의미조차 모두 이해했다 말하기 어렵다. 안으로 겉으로 담뿍 담긴 것들을 능력부족으로 제대로 끄집어내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정말이지 마음에 드는 소설이었다. 소설의 실질적인 주인공은 후이지만 '선글라스'를 벗고 '그림자'에서 벗어나려 했던 '못쓰게 되어버린' 한정효란 인물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 여전히 '독재'와 '장군'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한 우리의 현실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나라 작가의 글을 읽고 느끼는 '좋다'라는 감정은 번역서를 읽고 느끼는 '좋다'라는 감정과는 그 깊이와 무게와 빛깔이 다르다. 아마도 모국어에서 오는 다름일 것이다. 오랜만에 그 다름을 느끼게 해준 고마운 글이었다.


사랑을 하면 눈이 멀게 된다는 말은 정확하게 맞는 말이 아니지만 아주 틀린 말도 아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의 시력 문제는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 잘 보는 것,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 더 분명하게는 보고 싶지 않은 것은 보지 않고 보고 싶은 것은 확대해서 보는 데 있다. 그러니까 만난 지 얼마 안 된 남자가 당신은 내 첫사랑을 닮았어요, 하고 고백할때, 그 사람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사랑에 빠졌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도 모르게 자기에게 속고 있을지언정 상대를 속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큰 눈이나 가느다란 허리나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누군가를 떠올릴 필요는 없다. - P.49

차동연의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았다. "세상의 권력은 그들의 구별된 공간인 천산을 침범하고 파괴하여 카타콤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침범하고 파괴하는 권력이 행사되는 이 세상이야말로 카타콤에 다름 아님을 그들의 구별된 삶과 특별한 죽음으로 증거했다." 그들은 세상으로부터 부정되었지만, 그전에 세상은 그들에 의해 부정되었다. 세상은 그들을 버렸지만, 그전에 그들은 세상을 버렸다. 어떤 의미에서는 버려지는 것이 그들이 세상을 버리는 방법이었다. 세상은 더 이상 그들의 믿음과 소망을 간섭하지 않았다.
- P.3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