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 - 펄 S. 벅

2014. 6. 29. 20:33



막연히 펄 벅의 <대지> 하면 미국의 광활한 땅과 그 땅을 관리하는 대지주가 떠올랐었는데 첫 문장을 읽는 순간 소설의 배경과 주인공이 중국임에 놀랐다. 펄 벅이 어린 시절을 중국에서 보냈고 영어보다 중국어를 먼저 배웠을 만큼 중국과 밀접한 생활을 했다는 것을 알고 나니 이 소설이 쓰인 배경이 단박에 이해가 된다. 소설 속엔 작가 자신이 중국에서 생활하며 직접 보고 듣고 느낀 중국 농민들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있어 허구이지만 종종 현실처럼 읽히기도 한다. 직접 경험 한 번이 간접 경험 백 번보다 훨씬 큰 영향력이 있음을 소설을 읽으면서도 느끼게 된다.

왕룽가의 흥망성쇠를 그려내고 있는 소설 속에서 유독 마음이 끌렸던 인물은 '왕룽'의 조강지처 '오란'이었다. 대갓집에서 종으로 일하던 오란은 늙은 아버지와 사는 가난한 농부 왕룽에게 시집을 오게 된다. 오란은 예쁘지도 않고 살가운 성격도 아니지만 건강하며 요리 솜씨가 뛰어나고 부지런하여 남편을 도와 묵묵히 집안일과 농사일을 해나간다. 시집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왕룽과 늙은 시아버지가 원하던 대를 이을 아들도 낳아준다.

오란은 강인하다. 이 소설 속에서 가장 강인하고 가장 안타까운 인물은 오란이었다. 방안에서 홀로 고통을 참으며 아이를 낳고 뒤처리까지 하는 장면을 읽으면서 도대체 무엇이 오란을 저렇게까지 독하게 만들었을까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본문에선 오란의 과거에 대해 자세히 다루지 않기 때문에 대갓집에서의 종 생활이 원인일 거라고 짐작할 뿐이다. 왕룽이 찻집 여자에게 금비녀를 선물하려고 오란이 가슴속에 고이 간직해온 진주까지 빼앗았을 때는 내 마음마저 미어지는 기분이었다. 그 순간 분명 오란의 안에 중요한 무언가가 무너져내렸을 것이다. 차라리 왕룽을 붙들고 화를 내며 욕이라도 했으면 나았을 텐데 모든 감정을 안으로만 삼키는 오란은 미련스러울 만큼 답답하고 안쓰럽다. 왕룽에게 있어 신뢰할 수 있는 반려자였지만 여자는 아니었던 오란의 삶. 소설 속 오란의 마음은 알 길이 없지만 나는 그녀의 삶이 못내 서글프다.

조용히 모든 생명을 품는 대지처럼 생명력 넘치는 글이었고 흥미로운 가족 드라마 한 편을 본 듯한 소설이었다. 드라마 제목을 짓자면 '왕룽가의 대지' 정도 되려나. 이상하게 퓰리처상 받은 소설과는 잘 안 맞는 편인데 <대지>는 정말 재밌게 읽었다. 펄 벅 저서를 검색해 보니 중국을 소재로 한 책들이 많다. <연인 서태후>도 펄 벅 소설이던데 읽어보고 싶다.


"당신 진주 어디 있어?" 그리고 그녀는 웅덩이 가장자리의 매끄럽고 납작한 돌 위에 놓고 두들기던 빨래에서 눈을 들며 말했다. "진주요? 제가 가지고 있는데요." 그리고 아내는 쳐다보지도 않고 그녀의 주름지고 물에 젖은 손에 시선을 던지며 그가 중얼거렸다. "쓸데없이 진주를 지니고 있을 필요가 없잖아." 그러자 그녀가 천천히 말했다. "전 언젠가는 그걸로 귀고리를 만들 생각이었어요." 그리고 왕룽이 웃을까 봐 겁이 났는지 그녀가 다시 말했다. "작은 딸이 시집갈 때 쓰고 싶었어요." 그는 마음을 단단히 먹으며 큰 소리로 반박했다. "흙처럼 피부가 시커먼 애한테 왜 진주를 달아주려고 그래? 진주는 피부가 하얀 여자들한테나 어울리는 거야!" 그러더니 잠깐 침묵을 지킨 다음에 그가 소리쳤다. "그거 이리 내. 쓸 데가 생겼어!" 그러자 천천히 그녀는 주름지고 젖은 손을 가슴으로 집어 넣어 조그만 꾸러미를 꺼내 그에게 주고는 꾸러미를 펴는 남편을 지켜보았으며, 그의 손에 놓은 진주들은 햇빛을 받아 부드럽고 눈부시게 반짝였고, 왕룽이 웃었다. 그러나 오란은 다시 옷을 두들기기 시작했고, 눈에서 천천히 무겁게 눈물이 흘러내렸어도 그녀는 손을 들어 그 눈물을 닦아내지 않았고, 돌멩이 위에 깔린 옷을 나무 방망이로 더욱 줄기차게 두들길 따름이었다. - P.249~2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