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 - 헤르만 헤세

2014. 5. 31. 22:08



인간으로 태어나 온전한 나의 의지로 온전한 나의 삶을 사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알을 깨고 나왔을 때 내게 주어진 세계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의심하고 비판하고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며, 그 세계에 맞서 홀로 싸우는 것이 가능한 인간이 된다는 건 어쩐지 굉장히 비현실적인 이야기로 들린다. 물론, 자신만의 데미안을 찾아 오롯이 나의 의지로 스스로의 삶을 사는 사람도 많겠지만 내게 주어진 세계 안에서 안주하고 내 의지보단 타인의 의지로 편한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도 많다. 누구나 전자의 삶을 꿈꾸지만 녹록지 않은 현실에 부딪혀 후자의 삶에 머물러 사는지도 모른다. 내 안의 데미안을 찾지 못한 자의 변명에 불과하겠지만 내면의 성장과 자아실현을 외치기엔 이 나라에선 삶이 너무 고되다.

처음엔 이 소설을 민음사 버전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문장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중간에 멈추고 다른 출판사 버전으로 주문해서 읽었다. 재미가 없는 건 이해할 수 있지만 이건 그 이전의 문제였다. 내가 독일어 원서를 읽을 수 있는 건 아니니 번역 자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할 수는 없지만, 우리말 문장 자체가 매끄럽지 못하고 제대로 이해되지 않는 건 분명하다. 번역은 외국어도 잘해야 하지만 그 이전에 국어를 잘해야 하는데 그 부분에서 엄청난 결함을 보인 번역이었다. 새로 주문한 사계절 출판사 <데미안>은 독일어 전문 번역가 박종대 씨가 번역하셨는데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문장이 정말 좋았다. 이런 고전 소설 뒷부분엔 흔히 본문보다 더 암호 같은 해설이나 작품 소개가 붙는데 그런 부분이 없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마지막 '옮긴이의 말'에서 박종대 씨가 민음사 <데미안> 번역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있는데 (대놓고 출판사를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누가 봐도 민음사) 일부분을 옮겨보자면

……그간 가장 많이 팔렸다는 <데미안> 번역서를 구해 원서와 대조해 보다가 그만 덮고 말았다. 표현상의 미숙함은 차치하고 기초적인 자료 조사와 작품 이해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명백한 오역도 곳곳에서 눈에 띄었으며, 우리말 자체에도 심각한 결함을 보였다. 그런데도 유명 대학의 교수가 번역했다는 이유로 권위 있는 번역본으로 인정받고 있다. 부끄러운 일이다. 독자들은 함량 미달의 번역본을 읽으며 좀처럼 이해가 안 되는데도 그것을 자신의 이해력 부족으로 돌리거나, 아니면 원서가 원래 그렇겠거니 하고 넘어간다. 독자들의 이런 너그러운(?) 오해를 토대로 수준 미달의 번역서를 팔아먹는 것은 속임수다.……

민음사 <데미안>을 끝까지 참고 읽지 않은 게 다행이다 싶고 그동안 민음사 버전으로 읽은 세계문학 전집들의 번역까지 의심스러워졌다. 이미 사 둔 책들은 어쩔 수 없지만, 앞으로는 출판사 별로 번역을 더 꼼꼼히 살펴봐야겠다. 세계문학 전집을 책장에 쫙 꽂아두는 것이 작은 소망중의 하나인데 번역이 들쭉날쭉하다 보니 한 출판사의 전집을 콕 집어 사는 건 아무래도 어려워 보인다. 원서를 읽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니 슬픈 일이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몸부림친다. 새는 세계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이다. - P.135

"누구도 집으로 완전히 돌아가지는 못해요. 다만 서로에게 끌리는 길들이 만나는 지점에서는 온 세상이 잠깐 고향처럼 보이기는 하죠." - P.207

"사랑은 애원하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에요. 자기 속에서 먼저 확신하는 힘이 있어야 하죠. 그러면 사랑은 더 이상 끌려가지 않고 당기기 시작해요. 싱클레어, 당신의 사랑은 나에 의해 끌려가고 있어요. 언젠가 당신의 사랑이 나를 당기면 그땐 내가 가겠어요. 나는 나 자신을 선물로 주고 싶지 않아요. 사랑은 쟁취하는 거예요." - P.221

붕대를 가는 것은 아팠다. 이후에는 내게 일어나는 모든 것이 아팠다. 하지만 그 뒤로 나는 마음의 문으로 들어가는 열쇠를 발견해서, 운명의 영상들이 검은 거울 속에 잠들어 있는 마음속 깊은 곳으로 내려갈 때면 그 거울 위로 몸을 숙이기만 하면 나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내 친구이자 인도자였던 데미안과 똑같이 생긴 내 모습이. - P.2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