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평범한 연애사와 가족사가 될 뻔했던 이야기에 '시간여행'이라는 걸림돌을 놓음으로써 소설로 내놓기에 손색없는 이야기가 완성된다. 남주인공 헨리 드템블은 훗날 유전성 질환의 하나로 밝혀지는 시간일탈장애인으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시간 여행을 한다. 그 시간 여행에 물건은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다. 밥 먹다가도 자다가도 일상생활 중에 시도때도없이 맨몸으로 낯선 장소, 낯선 시대에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헨리는 잠긴 문을 여는 방법을 배우고, 소매치기 기술을 익히는 등 말 그대로 낯선 장소에서 살아남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과거로 돌아갔을 경우엔 돌아가신 어머니와 아직 어린 자기 자신을 만나기도 하고, 미래에선 자신의 딸과 할머니가 된 아내를 만나기도 한다.

모든 건 제어할 수 있을 때 쓸모가 있고 의미가 있는 것이지 헨리의 시간 여행처럼 제어할 수 없는 능력은 결코 축복이란 생각이 들지 않는다. 우선 본인 자신이 가장 괴롭고 힘들 테고 나중에 가정을 꾸렸을 때 배우자의 불안과 외로움을 채울 방법이 없다. 언제 어떻게 어디로 떠났다가 언제 어떤 모습으로 돌아올지 모르는 사람을 평생 사랑하고 기다리는 일을 과연 할 수 있을까? 나는 못 한다. 연애는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결혼까지 하기엔 희생하고 참아야 할 것들이 너무 많이 보인다. 그래서 그런가 소설 속 클레어가 정말 대단한 여자로 느껴졌다. 무려 6살 때 숲 속에서 처음 만난 알몸의 36살 남자에게 타월을 건네주고 부탁을 들어주는 아이라니! 만약 나였으면 숲 속에 변태 아저씨가 있다고 집에 알리고 경찰이 끌고 가는 걸로 마무리가 됐을 텐데 (로맨스 따위 진행될 수가 없음) 역시 로맨스 소설 여주인공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

영화보다 소설이 더 좋다고들 해서 소설을 먼저 읽은 건데 기대에 미치진 못했다. 온갖 감정이 70%쯤 차오르다가 서서히 사라져버린다. 넘치는 것보단 모자라는 것이 낫지만 조금만 더 가면 될 것 같은데 어중간한 지점에서 멈춰버리니 아쉽다. 그들의 피곤한 사랑에 읽는 나까지 지쳐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소설이 이래서 영화에 대한 흥미도 사라졌다.


"지금 멈출 수 있다면… 더는 시간 여행을 하지 않아도 된다면, 그래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것 같아요?" "지금 이 순간에 멈춘다 해도 당신을 만나긴 하는 건가?" "난 벌써 만났잖아요." "응, 여기서 멈출 거야." 나는 어두운 차 안에서 클레어를 쳐다본다. "그럼 우스울 거예요. 당신은 결코 알지도 못하는 그 모든 추억을 나만 갖고 있을 테니까. 그럼 아마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과 같이 있는 기분이 들 것 같아요. 사실 우리가 만난 뒤로 난 계속 그런 느낌이었어요." 내가 웃음을 터뜨린다. "그럼 앞으로 당신은 내가 이리저리 부딪히며 그 추억 속으로 들어가서, 내가 추억의 조각을 모두 모아 완전히 맞출 때까지 지켜보게 되는 거네." 클레어가 미소를 짓는다. - P.3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