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숙만필 - 황인숙

2014. 4. 28. 22:10



김만중의 <서포만필>이 아닌 황인숙의 <인숙만필>이다. 저자의 이름이 미영이나 영희가 아닌 인숙이어서 맞춘 듯 잘 어울린다. 본문을 다 읽고 책 끝머리에 붙은 발문(跋文)을 읽는데 발문을 쓴 이가 고종석이다. 바로 전에 읽은 책의 저자와 이어서 읽은 책의 저자가 친구였다니 작은 우연의 일치가 즐겁다. 발문에 쓰인 '친구라는 사실만으로도 자랑스러워지는 사람'이라는 다소 낯간지러운 찬사에 미소 짓게 된다. 분명 말이 아닌 글이기에 스스럼없이 할 수 있는 찬사이리라.

<일일일락>에 이어 두 번째로 접하는 황인숙의 책인데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글의 온도가 딱 좋다. 단순히 재미있고 잘 읽히는 글이 좋아서 소설과 수필을 가장 좋아하는데 마음에 드는 소설보다 마음에 드는 수필을 찾기가 더 어렵다. 소설보다 수필이 더 현실적이고 개인적인 성향을 드러내는 글이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인숙만필>에서 가장 강렬하게 느껴지는 건 계절감이다. 추위를 많이 타서 겨울이 오는 것을 두려워하는 저자의 글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계절은 겨울이다. 두려운 만큼 더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 까닭일까. 겨울을 녹이는 봄 이야기는 필연적으로 따라와 앞다투어 종이 위에 꽃을 피운다. 이제 라일락이 지고 있으니 다음은 아카시아꽃 차례인가 보다. 예전엔 이곳저곳 아카시아 나무가 많아서 아카시아 꽃향기를 맡을 일도 많았는데 지금은 부러 찾아가지 않으면 보기 어렵다. 마치 포도송이처럼 줄기따라 주렁주렁 매달린 하얗고 작고 향기로운 꽃송이들. 장미처럼 겉모습이 화려하고 예쁜 꽃보단 라일락이나 아카시아처럼 향기가 좋은 꽃이 더 좋다. 지금은 꿈에 불과하지만 나중에라도 마당 있는 내 집을 갖게 된다면 라일락 나무를 심고 싶다. 색이 있는 것보단 우리 옆 집처럼 새하얀 것이 좋겠다.

본문 마지막 즈음엔 연속으로 배, 제주도, 바다, 물 이야기가 나와서 읽기가 괴로웠다. 떠나간 이들과 남겨진 이들의 슬픔은 나로선 감히 짐작도 할 수 없고 섣불리 어떠한 위로의 말도 할 수 없다. 내가 이 나라의 어른이라는 것이 그것도 무능한 어른이라는 것이 부끄럽고 미안할 뿐이다.


울음은, 눈물은, 정말 필요한 사람을 위해서 상비약처럼 아껴둬야 한다. 정말 그것이 필요한 사람을 위해서 순도와 농도가 떨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물이 돼버려서는 안될 눈물을 위해서. - P.15

회사원으로 오래 일하면 위기에 여유를 갖는 능력이 퇴화되기 십상이다. 회사원이란, 회사라는 어른에게 보호받고 조종받는 어린애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회사원이란 나 같은 자유직 사람과는 달리 인생에 보너스가 없는 존재인데, 보너스가 없는 인생은 마음에 여유를 갖기 힘들 것이다 - P.90

북유럽의 사람들은 꽃처럼 햇빛을 보면 환장을 한다고 한다. 여기는 북유럽이 아니지만 낮에 나다니는 일이 별로 없었던 나로서는 한 주일 동안 햇빛 속에 나가 있어야만 하는 일이 기대된다. 그 시간에 돌아갈 곳도 없이 하염없이 햇빛 속을 떠돌아다닐 생각을 하니 희열이 느껴진다. 발이 부르트도록 쏘다녀야지. 앞으로 한 주일 동안은 어떤 꽃도 나 모르게 피는 일이 없을 것이다. 어떤 바람도 나 모르게 불지 못하고 어떤 비도 나 모르게 내리지 못하고 어떤 햇빛도 나 모르게 나오지 못할 것이다. 온몸이 봄을 요구한다. 나는 제대로 봄을 맞을 것이다. 공짜인 봄을. - P.1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