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통 무채색으로 가득하다. 색을 지닌 것은 시뻘건 씨발됨 뿐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떠나간 고모리 마을. 젊은 어머니는 형제에게 폭력과 폭언을 일삼는다. 재개발 보상만을 바라보며 사는 늙은 아버지는 형제에게 무관심으로 일관한다. 그들은 엉킬 대로 엉켜 그 시작점을 찾아낼 수 없는 실타래 같은 사람들이다. 그 씨발스런 실타래에서 태어난 앨리시어와 동생은 점점 더 씨발스러움에 묶일 뿐이다. 부모가 세상의 전부인 어린아이에게 벗어날 곳이란 없다. 씨발됨은 대물림된다.

육두문자가 난무하는 글 속에서 다소 혼란스러웠다. 형제가 처한 야만적인 상황을 표현하기 위한 언어적 도구일 테지만 <百의 그림자>의 여운에 벗어나지 못한 내겐 낯선 것이었다. 픽션이든 논픽션이든 아이들이 고통받는 이야기는 싫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도 내내 가슴이 답답했다. 세상 모든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것들에서 눈을 돌리고 살 순 없겠지만, 일부러 보고 싶진 않은 게 솔직한 마음이다. 글 이전에 소재 자체가 나에겐 맞지 않는 소설이었다.


그 계집애는 한 권뿐이었다는 것을 알까. 앨리시어의 동생이 가진 단 한 권의 공책. 그게 그것이었다는 것을 알까. 그가 공책을 아끼려고 필기를 좀처럼 하지 않는다는 것, 때로는 이전에 필기했던 내용을 지우고 지우개질 흔적으로 거칠거칠해진 종이에 다시 필기한다는 것, 그런 걸 알고 있었을까. 몰랐을 것이다. 멍청하니까. 아둔하니까. 알았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는지도 모르겠다. 맛을 보아야지. 배가 아플 정도로 서글픈 상태라는 것을 모르는 계집애는 맛을 봐야지. 무신경한 인간은 상처를 받아봐야 안다. 찢어져야지. 두고 봐라 너도 찢어져야지. - P.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