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서를 제외하면 크게 가리는 책은 없는 편이고 로맨스 소설도 글만 좋다면 찾아 읽는 편이다. <가스라기>는 재밌다는 말은 많이 들었는데 구하기가 쉽지 않아서 (원가보다 비싸게 주고 사고 싶진 않았으니) 잊어가고 있던 차 중고서적 사이트에서 만원도 안 되는 가격에 올라왔기에 바로 구매했다. 로맨스 소설 자체가 수요가 적어 소량만 찍는 건지 출간된 지 오래된 건 절판되어 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라고 썼는데 검색하다 보니 <가스라기> 외전을 포함한 개정판이 나온다는 글이 있다. 프리미엄 붙여서 샀으면 배가 많이 아팠을 텐데 그나마 다행이다.

하늘 위 가장 고귀한 존재 천군과 지한, 땅 위 가장 비천한 존재 가스라기. 스스로 몸을 지키고 살아남아야 했기에 생존에 필요한 본능만이 존재했던 가스라기에게 하늘에서 떨어진 천군은 새로운 삶 그 자체였다. 세상 만물 모든 것에 공평한 사랑을 나누어 주어야 하는 천군에게 가스라기는 처음으로 독점하고 싶은 무엇이었다. 하늘 위에 사는 선인이지만 천군에 대한 증오와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어둠에 잠겨있는 지한에게 가스라기는 목에 걸린 가시 같은 존재였다. 운명의 수레바퀴 아래 얽키고설키는 그들의 사랑 이야기는 평범한 인간들 사이의 그것이 아니었기에 더욱더 호기심을 자극했다.

소설을 다 읽고 나니 가스라기나 천군보단 항상 바짝 날을 세운 채 상대방을 공격하는 지한과 진선의 천수배필이지만 결코 그들에게 닿을 수 없는 상아님들이 더 깊고 아프게 기억에 남는다.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은 없지만 덜 아픈 손가락이 있는 것처럼 가스라기와 천군은 덜 아픈 손가락, 지한과 상아님들은 유독 더 아픈 손가락이었나 보다. 강한듯하지만 누구보다 약한 그들이 못내 눈에 밟힌다.

소문대로 <가스라기>는 재밌었다. 모두 세 권, 각 4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인데 책장에 선녀님 날개라도 달렸는지 쉼 없이 잘도 넘어간다. 삼라가 존재하는 시대, 땅 위 인간이 사는 하계와 하늘 위 선인과 선녀가 사는 선계가 이야기의 무대가 되어주고 삼각관계를 이루는 가스라기, 천군, 지한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조연들의 이야기도 깨알같이 흥미롭고 재밌었다. 가스라기의 정체에 대해선 처음부터 계속 의문을 품었던 탓인지 크게 놀랍지 않았는데, 천군과 지한의 관계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이어서 놀라웠다. 결말은 매우 심심해서 아쉬웠지만 적당히 무게 있고 적당히 위트 있는 문장은 글을 읽는다는 행위 자체를 즐겁게 만들어주었다. 외전도 있던데 결말과 비슷한 느낌이라면 찾아 읽을 필요까진 없을 것 같다.

남자는 선총을 받을 수 없는 걸까? 라는 다소 불순한 질문을 남기며 독후감은 이만 마무리한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아팠으니까."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그건 변할 수 없다. 그는 그녀가 처음으로 주운 상처 입은 사람이었다. 그녀의 삶은 그로 인해 짐승의 삶이 아닌 다른 것으로 변했다. 그의 상처를 냄새 맡고 핥아주는 것이 가스라기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기쁜 일이었다. - P.318~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