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말 부분의 반전을 앞세워 책을 홍보하고 있지만, 반전 자체보단 내용 전반에 녹아든 철학적 사유에 더 눈길이 가는 소설이었다. 주인공 토니의 고등학교와 대학 시절로부터 시작되는 소설은 그로부터 40년 후 그가 받게 되는 편지 한 통으로 인해 주인공 토니는 물론, 읽는 나까지도 혼란에 빠지게 된다. 소설은 본문에도 몇 번인가 언급되는 프랑스 철학자 파크리크 라그랑주의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다."라는 정의와 일맥상통하는 인간의 불완전하고 왜곡된 기억에 대해 조금은 불친절하지만 치밀하게 풀어내고 있다.

내가 사실이라고 믿는 나의 기억은 정말 온전히 '사실'일까. 나에게만 유리하게 각색된 '1인 각본'은 아닐까. 인간은 어쩔 수 없는 자기중심적 동물이자 망각의 동물이기 때문에 같은 일이라도 조금씩 나에게 좋은 쪽으로 기억하고, 좋지 않은 기억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무의식적으로 각색되거나 삭제되기도 한다. 과거의 토니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한 채 저주를 담은 편지를 썼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편지에 대한 기억은 토니에게 유리한 쪽으로 각색되었다. 그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왜곡된 기억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그들의 비극이 토니의 잘못이 될 순 없다. 누구의 잘못도 누구의 책임도 될 수 없는 불완전하고 부정확한 우리의 기억에 대한 소설이었다.

가끔 생각 없이 고른 책이 잭팟을 터트리는 경우가 있는데 이 책이 그렇다. 팟캐스트 '이동진의 빨간책방'에서도 다뤘던 책인가 본데 나는 단순히 싸서 샀다. 싼데 내용까지 좋았으니 정말 착한 책이지 않은가. 페이지가 쉽게 넘어가는 책은 아니었지만 <달과 6펜스>처럼 마음에 드는 문장이 정말 많은 책이었다. 모두 적다 보니 리뷰보다 덧붙인 글이 더 길어졌다.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입니다." - P.34

나는 우리 모두가 이러저러하게 상처받게 마련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완전무결한 부모와 오누이와 이웃과 동료로 이루어진 세상을 사는 것도 아닌데, 상처를 피할 도리가 있을까. 그렇다면 문제는, 수많은 것들이 걸린 그런 문제로 인한 손실에 어떻게 대처할까이다. 상처를 인정할 것인가, 아니면 억누를 것인가. 또 그 상처는 우리의 대인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인가. 상처를 받아들여 중압감을 덜어보려는 사람도 있을 테고, 상처받은 이들을 돕는 데 한평생을 바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더 이상 상처받지 않는 것을 주된 목표로 삼는 사람도 있다. 이들이야말로 피도 눈물도 없는 부류이자, 가장 조심해야 할 부류다. - P.80~81

나는 살아남았다. '그는 살아남아 이야기를 전했다.' 후세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을까? 과거, 조 헌트 영감에게 내가 넉살좋게 단언한 것과 달리, 역사는 승자들의 거짓말이 아니다. 이제 나는 알고 있다. 역사는 살아남은 자, 대부분 승자도 패자도 아닌 이들의 회고에 더 가깝다는 것을. - P.101

지난 몇 년 동안 마거릿이 해준 두 가지 이야기가 있다. 하나는 여자는 전혀 미스터리한 구석이 없는데 남자들이 이해능력이 떨어져서 그렇게 본다는 것이었다. - P.138

어쩌면 이것이 젊은 사람과 나이 든 사람의 차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젊은 시절에는 자신의 미래를 꾸며내고, 나이가 들면 다른 사람들의 과거를 꾸며내는 것. - P.141

배우면 배울수록 두려움은 줄어든다. 학문의 의미가 아니라, 인생을 실질적으로 이해한다는 맥락에서 '배우는' 것이다. - P.145

우리는 살면서 좌충우돌하고, 대책없이 삶과 맞닥뜨리면서 서서히 기억의 창고를 지어간다. 축적의 문제가 있지만, 에이드리언이 의미한 것과는 무관하게 다만 인생의 토대에 더하고 또 더할 뿐이다. 그리고 한 시인이 지적했듯, 더하는 것과 늘어나는 것은 다른 것이다. 나의 삶엔 늘어남이 있었을까, 단순한 더하기만 있었을까. 그것이 에이드리언의 글이 내 안에서 촉발시킨 의문이었다. 나의 삶에 더해진 것-과 뺀 것-은 있었지만 곱해진 것은? 그 생각에 이르자 나는 심란하고 불안해졌다. - P.153~154

그러나 시간이란…… 처음에는 멍석을 깔아줬다가 다음 순간 우리의 무릎을 꺾는다. 자신이 성숙했다고 생각했을 때 우리는 그저 무탈했을 뿐이었다. 자신이 책임감 있다고 느꼈을 때 우리는 다만 비겁했을 뿐이었다. 우리가 현실주의라 칭한 것은 결국 삶에 맞서기보다는 회피하는 법에 지나지 않았다. 시간이란…… 우리에게 넉넉한 시간이 주어지면, 결국 최대한의 든든한 지원을 받았던 우리의 결정은 갈피를 못 잡게 되고, 확실했던 것들은 종잡을 수 없어지고 만다. - P.162

에이드리언의 글은 또한 책임의 문제를 언급하고 있다. 연쇄적으로 이어지는 책임이 있는지 없는지, 혹은 책임의 개념을 그보다 더 협소하게 좁혀야 하는 건지 아닌지를 묻고 있다. 나는 그 범위를 좁혀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다. 미안하지만, 우리는 세상을 뜬 부모도, 형제자매도, 외동 신세도, 우리의 유전자도, 사회도, 그 어떤 것도 원망할 수 없다. 정상적인 환경에 있다면 안 될 일이다. 그와 정반대인 상황을 강력히 입증할 만한 것이 없다면, 자신의 인생은 전적으로 자신의 책임이라는 개념부터 챙겨라. - P.181

나는 인생의 목적이 흔히 말하듯 인생이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님을 얼마의 시간이 걸리건 상관없이 기어코 납득시킨 끝에, 고달파진 우리가 최후의 상실까지 체념하고 받아들이게 하는 데 있는 건 아닌가 생각할 때가 가끔 있다. - P.183

바로 뇌는 고정 배역을 맡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만사는 감소의 문제요, 뺄셈과 나눗셈의 문제라고 생각하기 무섭게 뇌가, 기억이 우리의 뒤통수를 칠지도 모른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속 편하게 점진적인 쇠락에 기댈 수 있다고 믿는다면, 꿈 깨시지. 인생은 그보다 훨씬 복잡하니까. 그래서 뇌는 이따금씩 파편적인 기억을 던질 테고, 심지어는 기억의 묵은 폐쇄회로를 터주기까지 할 것이다. - P.1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