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을 무어라 표현해야 할까. 아름다운 님펫을 향한 중년 남성의 순정일 수도 있고, 변태 소아성애자의 구구절절한 변명일수도 있다. 아름다움과 더러움, 우아함과 추악함, 나란히 세워두기 어려운 감정들 사이에서 중심을 잡기란 쉽지 않았다. 보편적인 도덕관념을 가진 나 같은 사람에겐 물론 불쾌한 이야기였지만 그 뻔한 도덕관념을 잠시 내려두고서라도 끝까지 읽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시처럼 아름다운 글 때문이었다.

'롤리타, 내 삶의 빛, 내 몸의 불이여, 나의 죄, 나의 영혼이여. 롤-리-타. 혀끝이 입천장을 따라 세 걸음 걷다가 세 걸음째에 앞니를 가볍게 건드린다. 롤. 리. 타.'로 시작되는 소설은 그 자체가 한 마리 나비였다. 첫 문장부터 마지막 문장까지 나풀나풀 손끝에 닿을 듯 말 듯 닿지 않는 아름다운 나비를 쫓는 일련의 여행이었다. 험버트와 롤리타를 따라 느릿느릿 그러나 속속들이 들여다보며 음미하는 3주간의 여행. 소유할 수 없는 대상을 향한 무한한 애정과 무서울 만큼의 집착을 언어라는 도구를 이용해 예술로 승화시켰다는 점이 놀라운 소설이었다. 작가가 괜히 작가가 아니겠지만, 언어를 이렇듯 자유자재로 다루는 작가들을 만나는 건 언제나 감탄스럽다.

<롤리타>의 주석과 해설을 담당했던 앨프리드 아펠은 “전 세계의 속독가들이여, 유념하라!『롤리타』는 여러분을 위한 책이 아니다." 라고 단언했다. 롤리타는 정말이지 속독을 할 수도 없고, 속독을 한다 한들 아무 의미가 없는 책이다. 이 책에서 심미적 희열과 언어유희를 뺀다면 무엇이 남는단 말인가. 속독은 이 두 가지 모두를 놓칠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이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가 풀어놓은 아름다운 언어의 나비를 따라 천천히 느릿느릿 곱씹어 읽고, 또 읽어야 할 소설이다. 

작가는 러시아 출신이지만 여러 이유로 미국으로 귀화한 뒤 모국어가 아닌 제2의 언어, 영어로 <롤리타>를 쓸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만약 그가 영어가 아닌 러시아어로 <롤리타>를 썼다면 더 아름다운 글이 탄생했을지 궁금해진다.


롤리타, 내 삶의 빛, 내 몸의 불이여, 나의 죄, 나의 영혼이여. 롤-리-타. 혀끝이 입천장을 따라 세 걸음 걷다가 세 걸음째에 앞니를 가볍게 건드린다. 롤. 리. 타. - P.17

유한한 생명을 가진 인간의 양심이란 아름다움을 즐긴 대가로 치르는 세금 같은 것. - P.455

지금 나는 들소와 천사를, 오래도록 변하지 않는 물감의 비밀을, 예언적인 소네트를, 그리고 예술이라는 피난처를 떠올린다. 너와 내가 함께 불멸을 누리는 길은 이것뿐이구나, 나의 롤리타. - P.4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