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봤어 - 김려령

2013. 12. 15. 21:30



한 사람의 인생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치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나를 있게 한 존재, 부모일 것이다. 흔히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 표현하는 경제적인 능력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부모의 인성이라고 생각한다. 가난하고 삐뚤어진 부모 밑에서 바르게 자라나는 아이도 있지만 그 아이가 받은 내면의 상처는 평생 그 어떤 것으로도 치유할 수 없다. 아이가 성인이 되어서까지 문제의 가족과 단절하지 못하면 상처는 계속해서 덧생기고 짓무르고 썩다가 어느 순간 모든 것을 먹어치운다. 소설 속 수현은 바로 그런 사람이다.

과거 가족에게 시도때도없이 폭력을 행사했던 아버지가 있다. 과거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렸던 어머니는 이제 한 쪽으론 큰아들의 폭력에 시달리며 한쪽으론 작은아들에게 손을 내민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도 사람 노릇 못하는 쓰레기 같은 형이 있다. 수현은 마음속 깊은 곳, 언제부턴가 생기기 시작한 시커먼 무언가로부터 눈을 돌리고 작가와 편집자로서 성공하게 된다. 작가로서 이름을 알린 뒤 같은 직업을 가진 지연과 결혼하지만 애정이 없는 결혼 생활은 수현과 아내 모두에게 비극으로 막을 내린다.

이렇게 온갖 상처로 너덜너덜해진 마흔여섯 살 '정수현' 앞에 '서영재'가 나타난다. 수현의 말을 빌리자면 "처음으로 내 것이었으면 하는 사람을 만났다." 둘은 설렜고 사랑했고 행복했다. 하지만 단 한 번 자신을 거부했던 영재의 앞에서 수현은 돌변한다. 잠시 외면하고 있었던 그 안의 어둠이 영재에게 손을 뻗친다. 수현의 행동이 모두 정당화될 수는 없지만 그를 벗어날 수 없는 어둠의 나락으로 떨어트린 가장 큰 원인은 가족이었기에 동정이 갈 수밖에 없었다.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 그의 인생은 끝까지 풀리지 않고 깊은 어둠의 수렁 속으로 떨어졌다. 마흔여섯 해 만에 처음으로 만난 사랑은 밝게 빛났지만 수현을 어둠에서 건져내기엔 부족했다. 현실 속 수많은 정수현을 생각하면 답답해질 수밖에 없는 소설이었다.

전체적으로 무난한 소재였고 문체는 깔끔한 작가라서 거슬릴 것이 없었는데 마지막 에필로그는 없느니만 못했다고 본다. 읽는 내내 이건 성인 소설이야라고 외치는 느낌이 들어서 오히려 거부감이 들었다. 그동안 청소년 문학을 주로 썼던 작가가 너무 급작스럽게 변화를 주려고 하니 작위적인 느낌이 강해져 버렸다. 에필로그와 함께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었다. 


"뭐 하나 되는 놈 있다 싶으면 지가 그놈인 양 설치고, 골수까지 빨아먹고도 더 빨아먹을 거 없나 군침 흘리는 게 가족이야." 황사장이 한 말이다. - P.28

내가 가지 않은 모든 '만약'의 길은 후회와 미련으로 남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각자의 삶을 지키며 잘 살아내길 바랄 뿐이다. 살아 있는 당신에게 행운이 가닿길. - P.1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