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과 - 구병모

2013. 9. 24. 21:09



문장 하나하나가 너무 길다. 한 문장이 한 면 전체를 채울 만큼 긴 경우도 있다. 지금까지 읽었던 구병모 작가의 문장은 이렇지 않았었는데 싶어서 조금 의아하기도 했다. 청소년 소설과 일반 소설과의 차이인지 (애초에 청소년 소설과 일반 소설 간의 차이라는 게 존재하는지조차 의문이지만) 그저 이 소설만의 특징인지는 모르겠지만 지나치게 긴 문장은 내 얕은 집중력을 흩트려서 반갑지 않다. 그럼에도 참신한 재료로 끓인 담백한 맛의 글은 내 입맛에 딱 이었다.

지하철 안, 임신한 여성에게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하며 자리 양보를 요구하는 버릇없는 50대 남자가 등장하고 건너편 노약자석에 앉은 60대 노부인은 다른 승객들처럼 그 장면을 보고도 못 본 척 외면한다. 버릇없는 남자는 내릴 역이 다가오자 문 앞에 서서 하차를 기다리지만, 사람들에게 떠밀려 승강장에 쓰러진 채 생을 마감한다. 남자가 쓰러지기 직전 남자의 뒤엔 60대 노부인이 서 있었다. 노부인의 직업은 살인청부업자였고 버릇없는 50대 남자는 그녀의 목표물이었다.

방역업계=살인청부업에서 '조각'이라는 가명으로 불리며 오랜 시간 현역으로 활동한 그녀는 지금 60대 중반이다. 몸속 부품이 하나씩 삐걱대며 고장 나기 시작하는 나이. 강인한 신체와 예민한 정신을 필수로 요하는 방역업계에서 이미 자신은 퇴물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조각 그녀가 제일 잘 알고 있다. 하루가 다른 몸과 예전만큼 냉정하지 못한 정신을 부여잡고 현역에서 뛰면서 은퇴를 고민하는 조각에게 또 다른 고민거리 '투우'가 나타난다. 같은 방역업자이면서 첫 만남부터 조각에게 날을 세웠던 투우. 조각은 자신과 그 어떤 접점도 없는 그가 왜 자신에게 적의를 표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어 답답하다. 독자인 나는 알고 있지만, 그녀는 알지 못하는 이유. 그 이유를 향해 조각은 투우와의 마지막 결전을 준비한다.

냉장고 속, 그 속에서 이미 오래전에 잊혀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망가진 물체, 정확하게는 한때 과일이었던 것. 그 과일 한 개에서 이 소설이 시작됐다고 한다.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은 태어나고 잠시 빛났다가 다시 흔적없이 사라진다. 그 사라져가는 것들에 관한 이야기였던 파과(破果). 나도 내게 주어진 모든 상실을 부지런히 살아나가야겠다.


사라진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농익은 과일이나 밤하늘에 쏘아 올린 불꽃처럼 부서져 사라지기 때문에 유달리 빛나는 순간을 한 번쯤은 갖게 되는지도 모른다. 지금이야말로 주어진 모든 상실을 살아야 할 때. - P.332~3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