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시골에서 닭을 키우고 텃밭과 정원을 가꾸며 매일 반복적인 일상을 보내던 작가는 더 이상의 '식물화'를 막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터키를 시작점으로 불가리아, 루마니아, 폴란드, 발트 3국을 거쳐 최종 목적지인 핀란드에 닿는 일정이다. 터키는 여행 에세이에 단골로 등장하는 나라라 그런지 특별한 인상을 남기진 못했다. 불가리아에선 술이 맛있다는 정보를 입수했고, 드라큘라가 떠오르는 루마니아에선 귀여운 여행 동반자 '줄리안'을 만나게 된다. 줄리안과 함께한 폴란드에선 고가의 카메라를 도난당했고, 빌뉴스에선 길을 헤매고, 리가는 아름다웠으며, 탈린까지 다다랐을 땐 한시라도 빨리 핀란드로 향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탈린에서 한 시간 반 걸려 도착한 여행의 최종 목적지 핀란드의 첫인상은 좋지 못했지만, 호숫가 오두막에서의 하룻밤만큼은 말 그대로 '미친 듯이' 부러웠다. 동화에나 나올 법한 예쁜 오두막과 아름다운 호수, 신선하고 맛 좋은 채소와 과일, 여행의 피로를 풀어주는 사우나 그리고 마음이 통하는 누군가와의 맛있는 식사와 아름다운 오페라 관람까지. 여행의 마무리로 완벽하다. 주제를 벗어난 이야기지만 종종 매체를 통해 유럽을 접할 때마다 그네들의 선진화가 부러워진다. 사회적 약자와 동물에 대한 복지가 보장된 나라. 그곳에 태어난 선택 받은 사람들이 요즘 들어 더욱더 부럽게 느껴진다. 하루에도 수십 명이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이 나라는 이미 총, 칼 없는 전쟁터나 다름없다.

루마니아 여행 끝 부분에 작가가 키우는 수탉 '타이거' 이야기가 잠시 나오는데 엉뚱하게도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문장이었다. 아마존닷컴에서 사들인 닭 기르기 책에 의하면 닭을 가끔 안아줘야 주인과 유대가 커지고 성질이 유순해진다고 한다. 그리고 이어 닭을 안는 방법이 나오는데 작가가 키우는 닭은 어릴 때부터 자주 안아줘서 주인의 '끌어안음'에 익숙하다고 한다. 이 세상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진심이 담긴 애정 어린 손길은 거부하지 못하기 마련인가 보다.

영양 결핍이었던 영혼을 살찌워 본래의 자리로 다시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여행. 작가는 분명, 이 여행에서 자신을 괴롭히던 '식물화'로부터 완벽히 벗어났을 것이다. 그 약발이 언제까지 갈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여행 에세이를 좋아하는 이유는 안정된 현실을 버리고 낯선 세상으로 발을 내디딜 용기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책을 읽는 건 용기가 없어도 할 수 있는 일이니까. 가만히 내 방에 앉아 책 속으로 떠난 이번 여행도 즐거웠다. 세상만사 주위에 피해 주지 않고 즐거우면 된 거 아닐까. 결코 쉽지 않은 일이지만 조금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즐겁게 살자. 그 누구보다 자신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다.


핀란드는 지구의 북쪽 끝에 있다. 춥고 매우 조용하다. 여태 추우면서 조용하지 않은 곳을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나. 그 나라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것은 가이드북에 나와 있지 않은 소소한 것들, 설명하고 싶지만 불가능한 것들, 직접 가서 보지 않고서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미묘한 몇 가지다. 글이나 사진이 아니라 오직 스스로의 눈과 귀, 피부를 통해서만 느낄 수 있는 특징들. 바싹 말라 보기보다 아주 쉽게 불이 붙고 놀랄 만큼 화력이 세던 자작나무 장작.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푸른 빛은 물론 잔잔한 정도 또한 하늘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비슷하던 호수와 물풀, 들꽃, 덤불. 하늘을 향해 똑바로 뻗은 채 가느다란 가지에 앙증맞은 초록 잎사귀를 가득 달고 있던 하얀 숲. 평화 속에 어쩐지 우울함이 느껴지는 도시의 인적 드문 길. 언제 들어가도 붐비는 일이 절대 없던 슈퍼마켓. 한밤중에도 파르스름하게 빛나던 청색 하늘. 아무리 어려운 질문이라고 해도 술술 대답할 준비를 마친 듯 환하게 웃으면서 다가오던 젊은이들. 그리고 우리는 아직도,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의 북쪽에서 날아들 메일 한 통, 조금 낯선 형상과 배열의 알파벳으로 발신인이 찍혀 있을 그 희고 바삭한 편지봉투를 기다리는 중이다. 첫눈 소식처럼 반갑지는 않을지라도. - P.363~364